지난 10월3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일본 아베 총리 방한 및 한일정상회담 반대 각계 공동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한일정상회담 개최를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어의 절반이상은 한자에서 왔고, 일본어는 한자가 없으면 성립이 안된다. 이 때문에 한일간 외교현장에선 한자어가 자주 사용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일 한일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 “연내 해결”을 강조하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조기 타결”에 합의했다. 두 단어의 차이는 양국의 상반된 입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에게 ‘타결(妥結)’은 해결이 이미 끝났음을 의미한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법적문제가 완결됐다는 일본정부의 방침에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고수하고 있다. 타결은 국어사전에서도 ‘의견이 대립된 양쪽에서 서로 양보해 일을 마무리함’이라 설명하고 있어 얽힌 문제를 없어지게 하는 ‘해결(解決)’과 차이가 있다. 한일 모두 해결은 최종적 정리, 타결은 당사자간 절충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셈이다.

그런데 같은 한자어라도 뉘앙스가 다른 경우가 수두룩하다. ‘유감(遺憾)’은 정식사과라 할 수 없지만,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더 정중한 느낌으로 쓰인다고 한다. ‘검토’란 말도 사전적 설명은 거의 같지만, 일본에서 ‘검토하겠다’면 임시변통이나 면피의 성격이 포함되는 반면 한국에선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 쓰인다.

한일간엔 이처럼 한자 한마디가 오해나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애매한 부분을 덮고 국면을 타개하는데 오용되기도 한다. 50년 전 한일협정이 대표적이다. 평행선을 달리던 1910년 한일병합 관련 쟁점에 각각 독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표현을 동원했다. 강제병합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한국과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합법ㆍ유효했다는 일본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란 절묘한 문구로 타협했다. 일본측은 ‘이제 와서는 무효(もはや無?)’라고 해석했다.

번역에 따른 차이로 국민감정이 격앙되는 사태는 흔하다. 1990년 5월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언급한 “통석(痛惜)의 염(念)”은 사과의 진정성 논란을 불렀다.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는 뜻이 한국인에게 가해자란 위치를 망각하고 마치 남 얘기하는듯 들렸다. 난해한 단어를 동원해 일본 내 우익들의 반발을 피해가기 위한 꼼수로 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일부에선 “심한 모욕이다. 식민통치가 도중에 좌절돼 허전한 마음이 남아있다는 뜻이냐”는 지나친 해석까지 등장했다.

이런 소통부재는 현재의 위안부협상과 직접 연결돼 있다. 1995년 일본정부 주도로 설립된 아시아여성기금이 번역차이로 인한 국민감정 관리에 실패한 측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일본정부는 한국인 위안부피해자 152명에게 1인당 200만엔과 의료 및 복지비 300만엔을 지급한다는 방침에 따라 1997년 먼저 7명에게 돈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위로금’으로 인식되면서 반대움직임이 확산됐다. 한국정부가 1998년 일본측 돈을 받은 할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할머니들에게 지원금을 전달하자 아시아기금의 활동은 중단됐다.

할머니들이 “위로금을 받는 거지가 아니다”고 반발했고 여론은 들끓었다. 하지만 아시아여성기금 측은 피해자 지원의 성격을 ‘쓰구나이킨(償い金ㆍ속죄금)’으로 명명하고 있었다. 격앙된 국민감정에 이 점이 전해질 리 만무했다.

지금도 위안부 조기타결의 최대 장애물은 배타적 국민감정이다. 정상회담이 끝나기 무섭게 일본언론에선 ‘아베 총리가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강력히 요구했다’는 뒷얘기를 앞다퉈 보도했다.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해를 넘기기 직전에야 성사된 정상회담. 이후 위안부 현안을 시한폭탄처럼 안고 연말을 맞고 있다. 내년은 양국 모두 선거의 계절이다. 박 대통령이나 아베 총리가 국내정치으로부터 해방돼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걱정이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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