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과 배려, 존중의 마음이 화해

투쟁의 정치인이 남긴 조용한 유산

‘통합과 화합’ 위한 출발점 삼아야

지난 주 일본에서 프리미어리그12 한일 야구경기 준결승전이 있었다. 한국이 역전승을 거둔 뒤 대표팀 김인식 감독은 “강자가 약자에 질 때도 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일본 팬들의 댓글이 많았다. 그 가운데 “강자와 약자가 따로 없다. 승리한 팀이 강자다”는 반응이 눈길을 끌었다. 김 감독이 스스로 ‘약자’로 표현하면서 몸을 낮춘 데 대해 일본 팬들은 승리한 한국을 ‘강자’로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주최국인 일본은 자신들의 우승을 위해 갖가지 꼼수를 부렸고, 우리는 울분을 삼키며 적개심을 키웠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김 감독의 겸손과 일본 팬의 화답을 보며 마음 속 응어리는 사라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뜬금없이 한일전 야구경기를 떠올린 것은 ‘화해(和解)’라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다툼을 그치고 함께 밥을 나눠먹으며 좋지 않은 감정을 풀어 없앤다’는 의미다. 김 전 대통령의 삶은 ‘확신에 가득 찬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러한 정치역정에서 화해라는 단어가 끼어들 자리는 거의 없었다. 군사독재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의 ‘화기애애한 면담’도 있었고, 후보단일화를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교동 회동’도 가졌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적과의 동침’도 감행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향후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진정한 화해는 아니었다. 이후 ‘화해하는 모습’에서 한 발짝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스스로 화해를 공언한 것은 2009년 8월 투병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갔을 때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 이후 12년 만의 만남이었다. 병 문안을 마치고 나서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렇게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말했다. 평소의 말투로 보아 그 정도면 ‘파격적인 화해 선언’이었다. 8일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국장 기간 내내, 그 이후 오랫동안 우리 정치권에는 화해와 화합이 화두가 되었다. 두 전직 대통령 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사이의 ‘좋지 않은 감정 풀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영면을 앞두고 ‘통합’과 ‘화합’ 두 단어를 남겼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표현에 아들마저 다소 의아해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고 한다. 6년 전 ‘화해’를 공언했던 김 전 대통령은 세상을 향해 ‘통합과 화합’을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화해’의 분위기가 번지고 있고, 26일 열릴 국가장 영결식은 ‘통합과 화합’의 자리로 준비되고 있다.

화해의 출발은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배려, 존중하는 마음’이다. ‘비슷한 세력을 갖춘 상대방과의 경쟁과 싸움’ 이후의 문제다. 확실한 우열과 뚜렷한 강약이 드러나 있는 상황에선 경쟁과 싸움이 있을 수 없고, 화해의 문제가 대두될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의 정치현실은 화해라는 씨앗이 거의 메말라 죽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공격해놓고 이제부터 휴전하자고 말한다. 한편이 다른 한편에게 상처를 입혀놓고 불쑥 손을 내밀어 여기서 그만하자고 제의한다. 왜 계속 싸우려고만 드느냐, 왜 내미는 손을 맞잡지 않느냐고 힐난한다. 이쪽은 화해하자고 하는데 저쪽이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외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과 배려,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니 화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화해가 없으니 통합과 화합은 원초적으로 잉태가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강한 쪽, 작은 차이라도 이긴 편에서 주도해야 진정한 화해는 이뤄질 수 있다. “자, 이리 와서 화해의 잔을 받으시오”가 아니다. 화해의 잔을 들고 먼저 몸을 낮춰 내려가야 한다. 앞서 김인식 감독이 적을 ‘강팀’으로 인정하며 그들의 패배를 배려했기에 일본 팬들로부터 “한국이 강팀”이라는 존중을 받을 수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평생 체득했던 지혜를 뚜렷이 가르쳐주고 떠났다. 우리로서는 효율적으로 좋은 공부를 한 셈이다.

/정병진 논설고문 bjj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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