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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오늘도 공룡은 목 놓아 울었다

입력
2015.11.2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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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의 멸종에 대한 오해가 몇 가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바로 공룡이 멸종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공룡을 분류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는데 조류형 공룡과 비조류형 공룡으로 분류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과학적인 새로운 분류법에 따르면 새가 아닌 공룡은 6,600만 년 전에 완전히 사라졌지만 새인 공룡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아 있다. 새가 공룡의 후손이라기보다는 새는 그냥 공룡인 것이다. 공룡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맛있는 안주가 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한국 사람은 매년 평균 20마리의 공룡을 먹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공룡 요리는 치맥 또는 삼계탕이라고 불린다.

요리된 닭과 달리 살아있는 닭은 내게 무서운 동물이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집에서 키우던 닭이 갑자기 휙 날아오르더니 옆집으로 넘어갔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그 장면을 목격했고, 아버지는 내게 옆집에 가서 닭을 찾아오라고 하셨다. 옆집 아저씨는 시치미를 뗐다. 닭이 넘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공룡 발톱을 가진 닭을 넘겨받으면 그걸 어떻게 들고 오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시치미를 딱 떼니 나는 옳다구나 하면서 집에 와서는 “옆집에 넘어오지 않았다던데요.”라고 전했다가 엄청 혼났다. “야 인마! 네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그런 소리를 듣고 그냥 와!” 하지만 아버지라고 별 수 없었다. 시치미를 떼는데야 어떻게 하겠는가. 닭 한 마리 때문에 옆집과는 완전히 틀어졌고 덕분에 나는 매일 아침마다 광에 가서 공룡의 알인 달걀을 꺼내 와야 하는 귀찮고 무서운 일을 면하게 되었다.

1983년 5월,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던 김영삼 전대통령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3년 5월,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던 김영삼 전대통령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시 닭이 무서운 동물로 등장한 것은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사건은 1979년 8월 YH 무역 소속 여성노동자 172명이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하면서 시작되었다. 며칠 후 경찰이 신민당사에 진입하여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 한 여성 노동자가 추락해서 사망했고 김영삼 총재는 가택에 감금되었다. 그 와중에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 내용이 빌미가 되어 10월 4일 김영삼 총재가 국회의원에서 제명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당시 김영삼 총재는 이런 억하심정이 섞인 말을 뱉었다고 한다.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리고,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 그 말이 예언이 되었는지 며칠 후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그러니까 그때 국어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국부가 돌아가셔서 아비와 자식을 잃었을 때보다 더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된 것이고, 윤리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새벽이 왔으니 만세를 불러야 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닭의 모가지를 비트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이구나.

어쨌든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는 참으로 다행히도 (우리 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사회 혼란이나 일으키는’ 김영삼은 집에 갇혔고, (역시 우리 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100퍼센트 북한 간첩인’ 김대중은 미국으로 쫓겨났다. 우리나라는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1983년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면서도 일정한 패턴의 푸르스름한 사복을 입은 전경들의 눈치를 봐야 할 때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뭔가 무시무시 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냥 일상일 뿐이었다. 4월 19일 전후에 수십에서 수백 명의 학생이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로 시작하는 노래를 채 끝내기도 전에 진압되는 모습을 몇 차례 보기는 했지만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대학은 평온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혹시 술집에서 술벗을 기다리는 외로운 친구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독수리 다방 메모판을 뒤지던 중에 짧은 메모를 하나 봤다. ‘김영삼 총재 목숨 건 단식 OO일 째’. 당시 집에서 구독하던 <한국일보>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은 얘기였지만 나는 그게 거짓일 것이라고는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땐 그랬다.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기사는 신문에 나오지 않을 때였고, 그게 새삼스럽지 않고 당연한 것이었으며 평온한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내 맘이 움직였다. 목숨을 걸었다지 않은가! 요즘이야 누가 추운 겨울 수십 일 단식하든 수십 미터 상공의 철탑에 올라 수백 일을 싸우든 관심도 갖지 않는 척박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땐 좋든 싫든 누가 밥이라도 굶을라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만류도 하는 그런 시대였다. 전두환이 아무리 무서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래도 아직까지는 따뜻한 세상이었는지 김영삼 총재의 뜻은 이뤄졌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간의 사정도 신문에 실렸다.

1983년 5월 18일, 김영삼은 단식투쟁을 선언한다. 5월 25일, 정부는 김영삼을 병원에 강제 입원시킨다. 5월 29일, 정부는 가택연금 해제를 발표하고 상도동 자택과 병원에 있던 정보원들을 모두 철수시킨다. 6월 9일, 김영삼은 기독교계와 그 외 인사들의 설득을 받아들여서 23일간의 단식을 중단한다.

나는 김영삼 그 사람은 아주 독종이어서 정말로 죽을 때까지 단식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김영삼 총재를 가택연금에서 풀어줌으로써 단식을 중단할 명분을 준 전두환 대통령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내가 김영삼 총재를 존경하거나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 죽으면 안 되고, 누가 죽겠다고 하면 주변에서 나서서 어떻게든 말리는 게 당시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 새벽은 닭이 울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울음에 공감하고 어두운 밤을 함께 걷어내려 할 때 오는 것이 아닐까? 이육사도 이렇게 노래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오늘 새벽에도 이 땅의 공룡들은 목 놓아 울었지만 여전히 새벽다운 새벽은 오지 않고 있다. 누가 굶어 죽겠다고 나서면 좀 말리기라도 하자. 제발 같이 살자.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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