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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상징으로 독재청산도 단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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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상징으로 독재청산도 단칼에

입력
2015.11.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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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사 관통한 YS, 공과는 엇갈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여든여덟 해 삶은 파란만장했던 한국 현대정치사 그 자체였다. 그는 1954년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와 싸우고 70ㆍ80년대 민주화 운동사에서 한 축을 차지한 정계의 거목이었다. 그러나 90년 1월 민정당과 손잡고 3당 합당을 통해 정권을 차지한 이후의 행보에 대해선 공과를 둘러싼 평가가 엇갈린다.

1973년 9대 총선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 출마 포스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3년 9대 총선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 출마 포스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30여년 민주화 투쟁 앞장 섰던 정계 거목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섬마을이었던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났다. 남해안에 큰 멸치어장을 소유해 거제에서 소문 난 부자였던 부친 김홍조 옹(2008년 작고) 덕분에 유년 시절은 유복했다. 43년 통영중에 입학했다 45년 11월 부산 경남중으로 옮긴 김 전 대통령은 하숙집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 써 붙여 놓고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

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하며 어린 시절 꿈을 키워간 그는 대학 2학년 때 웅변대회 참석으로 전기를 맞았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2등상인 외무부장관상을 받으며 장택상 당시 외무부장관과 인연을 맺었고, 장 장관이 국회부의장으로 옮길 때 비서로 발탁되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이어 장택상 국무총리 밑에서 비서관을 지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54년 3대 총선 당시 경남 거제에서 여당인 자유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됐다. 만 25세 때였다. 그가 세운 최연소 의원 당선 기록은 여태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7개월 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을 탈당한 뒤 58년 4대 총선에 야당 후보로 나섰다 낙선하며 험난한 정치 역정이 시작된다.

61년 5ㆍ16 군사쿠데타는 그를 민주화 투사로 만들었다. 5대 총선으로 국회에 재입성한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장군이 이끌던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정 이양 번복 발표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고, 3선 개헌에 반대하다 69년 상도동 자택 골목길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40대 기수론’을 앞세우며 45세 때인 74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이후엔 박정희 유신체제와 맞서 싸웠다. 특히 79년 8월 신민당사 농성 중 경찰 강제진압에 사망한 YH무역 여성 노동자 사건과 이에 따른 의원직 제명은 결정적이었다. 그는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며 반유신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김 전 대통령 의원직 제명에 반발하는 ‘부마항쟁’, 10ㆍ26 등으로 박정희 정권은 막을 내렸다. 유신체제 종말에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김영삼의 공도 컸다는 평가다.

93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93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3당 합당 후 대통령 재임기 평가는 엇갈려

짧은 80년 서울의 봄을 거쳐 그는 다시 시련기에 접어들었다. 12ㆍ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그와 그의 정치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집중적으로 탄압했다. 80년 첫 가택연금은 81년 5월 해제됐지만 이듬해 6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전두환을 버려야 한다”고 한 발언이 문제가 돼 2차 연금에 처해졌다. 83년 5월 김 전 대통령은 목숨을 건 23일간의 민주화 요구 단식을 진행하고 84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 잡고 상도동, 동교동계를 망라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한다. 12대 총선에서 신민당 창당에 함께 동참해 야당 돌풍을 일으키고 8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헌 발표에 반대하는 범국민 투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도 참여하며 민주화에 일조했다.

그러나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후 길은 달라졌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 대선에서 2위에 머무르며 대권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넘겨준다. 이어 치러진 88년 13대 총선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에 제1야당 자리도 내준다.

그는 결국 90년 1월 집권여당이던 민정당, 김종필 전 총리가 이끌던 민주공화당과 자신의 통일민주당 등 3당 합당을 결정, 30여년 이어온 야당 정치인 생활을 마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주장했지만 야합ㆍ변절 시비는 끊이지 않았다. 여권 2인자로 변신한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박철언 전 의원 등 민정계와의 싸움, 내각제 개헌 합의 각서 파동 등 내부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며 92년 대선에 민자당 후보로 나섰다.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를 193만여표 차이로 누르고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민간 정통성을 강조한 ‘문민정부’를 내세웠고 93년 집권과 함께 독재 잔재 청산에 주력했다. 그는 첫 해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도 강행했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폭로가 나오자 5ㆍ18특별법이 제정됐고, 결국 검찰은 96년 1월 두 사람을 구속 기소했다. 검은 돈의 뿌리를 뽑겠다며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고위공직자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1급 이상 고위 공직자 재산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또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통해 96년 일제 잔재였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도 했다. 정권 초 대통령 지지율은 90%에 육박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암울한 시간이 이어졌다. 94년 추진하던 남북정상회담이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무산된 뒤 북한과 대립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96년 한총련 사태와 안기부법 노동법 날치기로 역풍에 휘말렸다. 97년 1월 한보철강 부도 등 경제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차남 김현철 비리를 비롯한 측근인사들의 부정부패로 지지율은 급락했다. 급기야 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수모를 겪으며 98년 2월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도동으로 쓸쓸히 돌아가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각종 현안에 대한 직설적 발언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거짓말쟁이’ ‘(노 전 대통령 탄핵은) 일방적 국정 운영의 결과’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야권 세력과 자연스레 멀어졌다. 2013년 4월 폐렴 증상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 입ㆍ퇴원을 반복하며 투병 생활을 해오던 그는 결국 22일 새벽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정상원기자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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