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들 수익 극대화 꼼수... 환자, 약물 내성 등 후유증

국내 일부 대학병원이 환자 이탈을 막기 위해 300~90일 치의 약을 한꺼번에 주는 장기처방을 남발하고 있어 비판이 거세다. 12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방문객들이 약 처방전 발급기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국내 대학병원(상급종합병원)들이 환자들 이탈을 막을 속셈으로 300~60일 치의 약을 한꺼번에 주는 장기처방을 남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환자들은 이로 인해 전에 없던 병이나 약물의존증을 새로 얻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도 밝혀졌다.

16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국내 38개 대학병원들은 최근 5년 새 300일 이상 약 장기처방 건수를 2배로 늘렸다. 2010년 2만9,500건이던 이 수치는 해마다 가파르게 올라, 2011년 3만6,737건, 2012년 4만1,416건, 2013년 5만7,079건, 2014년 6만7,051건으로 집계됐다.

또 300일에는 못 미치더라도, 180일, 90일, 60일 분량의 약을 한꺼번에 건네는 장기처방도 만연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장기처방이 꼭 필요한 환자들도 분명 있다. 고혈압, 갑상선 기능저하증 등으로 매일 일정하게 약을 먹어야 하는 만성질환자들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현재 국내 대학병원들의 약 장기처방이 환자 수 증가 등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많은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대학병원들이 장기처방을 남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환자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막아 수익을 극대화 하려는 꼼수라는 게 대학병원 교수 등의 설명이다. 의료쇼핑이 만연한 국내 현실에서 약 장기처방을 볼모로 환자들을 자신의 병원의 고객으로 붙잡아 놓기 위한 ‘보이지 않는 끈’이라는 것이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이와 관련, “300일 이상 약 처방을 받은 환자들은 병이 악화되거나 다른 질환이 발생하면 그동안 다니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환자의 건강과 편의를 핑계 삼아 환자군 관리를 위한 꼼수”라고 비판했다.

“의사 책무 저버린 비양심” 따가운 시선

환자를 많이 볼수록 수익이 커지는 병원 내 성과주의도 의사들의 장기처방을 부추기는 한 원인이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솔직히 대형병원 의사들은 병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면서 “MRI 등 고가 검사가 가능한 신규환자에 집중하고, 만성질환자들은 90일, 180일, 300일 이상 장기처방을 통해 관리하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대학병원으로의 환자 쏠림 현상도 약 장기처방의 배경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의 한 교수는 “처음엔 합병증 우려가 없는 만성질환자에게 1,2차 병원에서 치료 받을 것을 권고하지만, 밀려드는 환자에 시달리다 보면 장기처방이 습관화된다”며 “이는 환자를 보살펴야 하는 의사의 책무를 저버린 부끄러운 행위”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형병원의 전문의는 “장기처방 환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외래환자 예약이 증가했다는 증거”라면서 “예약환자가 많은 의사가 ‘명의’로 대접 받는 어이없는 현실이 개선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처방권을 가진 의사와 약을 판매하는 제약업계의 이해관계도 장기처방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의 대학병원 교수는 “지금은 리베이트가 사라졌다고 해도 제약업체에서 매년 100만개 약을 처방하는 의사와 10만개 처방하는 의사의 처우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150일치 처방 뒤 “환자 많다. 나가달라”도

약 장기처방에 따른 폐해는 병세 악화에서부터 약물내성 발생까지 심각한 후유증을 낳고 있다. 기억력 감퇴와 불안, 초조, 강박증, 우울 등 정신행동장애 증상으로 고통 받던 A(70)씨의 경우는 그 생생한 단면이다. A씨는 최근 서울 한 대학병원 신경과에서 진찰 받았다. 그는 MRI 등 고가 검사를 받은 후 담당의로부터 ‘아리셉트(치매치료제)’ 5개월치 처방 받았다. 그와 가족은 질환의 상태 등에 대해 의사에게서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의사는 ‘환자들이 밀려 있어 질환과 관련된 것은 인터넷을 찾아보라’며 진료실에서 나가줄 것을 종용했다. 비싼 돈을 들여 검사란 검사는 다했지만 병명, 치매 진행단계, 치료약물의 효과와 부작용 등과 관련된 설명조차 그는 듣지 못했다.

■ 300일 이상 장기처방전 발행 현황(단위, 건)

자료: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평소 우울증 증상이 있던 B(19)군도 비슷한 피해를 당했다. B씨는 서울의 상급종합병원 정신과 외래에서 항불안제 처방 90일치를 받았다. 꼬박 하루 3번씩 석달 동안 약을 복용한 결과는 약물의존성 발생. 결국 다시 병원 신세를 졌다. B군 부모는 “외래 진료 시 약물부작용과 관련한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면서 “그 의사에게 우리 아이는 그저 처리해야 할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적지 않은 수의 만성질환자들이 장기처방의 후유증으로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고혈압 환자의 경우 만성질환이더라도 정기적으로 상태를 점검 받아야 한다. 특히 65세 이상 고혈압환자들은 체중은 물론 직업 유무에 따른 생활변화가 동반될 수 있어 더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익명의 한 내과 전문의는 “만성 고혈압환자라도 경비 등 생활패턴이 완전히 바뀌는 직업을 얻게 되면 식사시간 변경에 따라 먹는 약을 조절해야 되는데, 기존에 처방 받은 약에 의존하다 저혈압이 발생해 새로 처방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의 장기처방은 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성인도 문제지만 청소년들에게 항불안제 등을 장기처방 하면 오남용으로 인한 약물의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 “치매환자의 경우 자신이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수 있고, 약 관리도 잘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같은 약이라도 대학병원서” 의료쇼핑도 문제

약 장기처방 문제는 감기에 걸리더라도 대학종합병원에 가야 직성이 풀리는 환자들의 의료쇼핑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성모병원 등 이른바 ‘빅5’ 병원에는 지난해 기준 1,000만명이 넘는 외래환자가 몰리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병원 관계자들은 “고속철 개통 후 지방 환자들의 방문이 큰 폭으로 늘었다”며 “잘 나가는 교수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약을 타가야 한다는 환자들의 성화를 말릴 방도가 없다”고 했다. 모 대학병원 외래 대기실에서 만난 한 고혈압환자(67ㆍ남)는 “사는 곳은 부산이지만 10년 넘게 이 병원에서 약을 타 먹고 있다”면서 “같은 약이라도 이 병원에서 처방을 받고 약을 타면 효과가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환자는 “부산의 병원에서도 같은 약을 처방받을 수 있는데 굳이 서울까지 와야 하는냐”는 기자의 물음에 “유명 대학병원 내과 과장과 지역에 있는 의사와 견줄 수 있느냐”고 받아쳤다.

약 장기처방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왜곡된 의료전달체계의 복원이 선결돼야 한다고 의료전문가들은 지적한다. 30병상 미만의 동네의원은 주로 경증 외래환자를, 30병상 이상 병원과 1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은 입원환자를,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질환 등 난이도 높은 환자들을 담당하는 본래 의료전달체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전문가들은 이를 위해서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90일 이상 장기처방을 제한, 환자들이 1,2차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질환을 점검 받을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상급종합병원들도 중증, 응급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숨통이 트여 보다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 돌보기를 최우선하는 의사들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형병원에서 처방한 인지기능 검사, MRI 검사 결과지 등을 싸들고 와 어쩔줄 모르는 한 우울증 환자와 보호자에게 질환의 문제점과 향후 경과 등을 오랫동안 자세히 설명해줬더니 그들이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하면서 눈물 흘리며 진료실 문을 나서더라는 한 전문의가 기자에게 보내온 익명의 편지가 전하는 메시지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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