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질의 명언 중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말이 있다. 역사란 그만큼 주관적이라는 뜻이다. 역사 인식은 권력과 밀접하다. 하지만 권력이 입맛대로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결국 실패한다는 것을 러시아 경우를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1917년 러시아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1921년 소련이 탄생했다. 당시 정권의 공식 구호는 ‘여태까지 역사를 깨끗이 지우고 새 역사를 쓰자’였다. 그에 맞춰 모든 역사적 기록, 이를 테면 러시아제국에 대한 평가 등을 모두 지워버렸다. 공산당 지침에 어긋난 역사 평가나 해석을 엄격히 통제했다. 부모님 말씀을 들어 보면 그때는 역사 교과서가 딱 하나였다. 역사 해석은 오로지 공산당 몫이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었다. 민주주의적 변화를 요구 받은 러시아 새 정부 아래서 여태까지 상상도 못했던 소련 공산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국가의 통제가 줄어들면서 역사 교과서도 출판사마다 또 대학마다 천차만별로 나오는 시기가 되었다.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들이, 역사를 연구하는 여러 교육기관들이 저마다 다양한 관점에서 러시아 역사를 해석한 교과서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는 관점은 교육기관 유형에 따라 많이 달라졌다. 국가가 운영하는 국립학교들은 국가 주장을 담은 교과서를 바탕으로 역사를 가르치는 데 반해, 사립학교들은 뚜렷한 반정부 색깔의 교과서를 이용해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러시아 교육부의 2012년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 국내에는 40개 출판사에서 나오는 65개의 역사 교과서가 있다는 보도를 본 적도 있다.

전남대 사학과 강사·대학원생·학부생들이 5일 오전 광주 북구 용봉동 전남대학교 인문대 앞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거부' 기자회견을 연 뒤 역사책에 노란풍선을 매달고 있다. 뉴시스

그런데 역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대통령 임기 초반부터 엄하게 비판해 왔다. 소련식 역사 교육을 찬양하면서 2013년 2월 국회 연설 때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역사 의식을 심어 줘야 하고 애국자를 키우기 위해 한 가지 역사 관점으로 통일해 가르쳐야 한다며 국정 역사 교과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푸틴 지지파는 현재 러시아의 역사가 많이 왜곡되어 있다고 했다. 특히 20세기 소련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들이 잘못 비추어져 이를 서방 국가들이 엄청나게 비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정 교과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푸틴 정권이 소련을 지나치게 미화한다고 비판했다. ‘올바른 역사 교육’의 방법은 유럽식 관점을 비롯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맞섰다. 특히 굴곡이 심했던 20세기 러시아 역사가 두 진영의 중요한 대결 장이었다.

국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련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 2차 세계대전 결과, 소련 붕괴 원인과 이로 인한 러일 또는 러미 관계 악화 등에 대한 현 친정부 매체들의 일방적인 해석을 문제 삼았다. 러시아 정부가 단일한 역사 교과서를 작성할 권리를 갖게 된다면 교과서에까지 이런 친정부 매체들의 논조가 이어져 내용에서 사실과 큰 차이가 생길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러시아 정부는 국정 교과서 편찬과 관련해 전문가 자문 등 사전 조사 작업을 거쳐 1년 반 뒤인 지난해 8월 발행 여부에 대한 방침을 발표했다. 결론은 교과서 출판 과정의 재정적인 부담과 사회적인 반발이 심해 국정 역사 교과서 발행 계획을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고 굳이 국정 발행 ‘포기’라는 말은 쓰지 않고, 국정 교과서를 만들지는 않지만 기본 아이디어를 살려 국가가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정하겠다고 했다.

특정한 틀을 만들어 그 범위 안에서 집필자가 역사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인데, 지금 러시아에서는 이런 강제마저 실은 무산됐다. 국립학교에서는 ‘국가 추천’이라는 문구를 단 몇몇 역사 교과서를 쓰고 있지만, 사립학교에서는 아무 제한 없이 교장이나 교직원들이 역사 교과서 선택권을 예전처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경험을 본다면 ‘국정’은 웬만해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제도다.

일리야 벨랴코프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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