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성의 일상 속 자연누리기(7)

꽃보다 단풍보다 아름다워라, 가을 열매들

가을이 깊어가는데 곱게 물든 단풍 보기가 쉽지 않다. 화살나무 종류 등 일찍 단풍이 든 관목류를 제외하고는 칙칙하게 말라가는 나무 잎들이 많다. 유례 없는 가을 가뭄 탓이다. 도심뿐만 아니라 유명 산들의 단풍도 올해는 예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울긋불긋 익어가는 나무 열매들이 있어 위안을 삼는다. 열매라고 가뭄 영향을 안 받았을 리 없지만 저마다 아름다운 색깔로 눈길을 붙잡는다.

그림 1불의 가시라는 뜻을 가진 피라칸사스 열매.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현란한 색깔을 자랑하는데 온난화 영향으로 요즘은 서울 지역에서도 조경용으로 식재한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열매들을 지나치기 쉽다. 봄의 화려한 꽃이나 가을의 현란한 단풍에 비해 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물들이 봄부터 부지런히 꽃 피우고 비바람 이겨내며 한 여름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 양분을 만들어낸 최종 이유가 바로 열매다. 장석주 시인이 ‘대추 한 알’이란 시에서 노래 했듯이 그 안에는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들어있다. 한 알의 열매에는 지난 계절의 여러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괜히 허허로워지기 쉬운 요즘 열매들은 가을이 결실과 감사의 계절임을 새삼 일깨워주기도 한다. 잎이 모두 진 뒤에도 겨우내 가지에 매달려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런데 알고 보면 열매는 인간에게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새들을 위한 상 차림이다. 새들이 겨울을 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식량이다. 가을 열매 중에 붉은 색깔이 많은 것도 새들의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서다.

새들은 열매를 먹고 대신 그 속에 든 씨앗을 멀리멀리 퍼뜨려 준다. 나무들은 요즘 아직 지지 않은 잎사귀 사이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새들에게 잔치 초대장을 보내고 있다. 나무 열매들은 대개 새의 뱃속에 들어가 소화액에 의한 화학처리 과정을 거쳐 배설된 뒤에야 싹을 잘 틔운다. 새와 식물은 언제부터 생존과 번식을 위해 서로 돕는 공생의 지혜를 터득했을까.

그림 2꽃사과 열매.

요즘 아파트 단지 녹지나 도심 소공원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열매는 꽃사과 종류다. 5월에 흰 꽃도 좋지만 사과의 미니어처처럼 생긴 작은 열매는 앙증맞게 예쁘다. 사과 종류가 다양한 만큼이나 꽃사과 열매도 다양하다. 같은 사과속(Malus)이면서 열매가 꽃사과 열매보다 훨씬 작은 것들도 있다. 야광나무이거나 아그배나무다. 두 나무는 꽃, 잎, 열매, 수피가 비슷해 구별이 매우 어렵다. 열매가 더 작고 꽃받침이 붙어있던 자리가 보다 넓은 원을 그리고 있으면 아그배나무다. 야광나무 열매는 이 부분이 좀 움푹하다. 아그배나무는 가장자리가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 잎들이 드문드문 있기도 하다.

그림 3아그배나무 열매.

붉게 잘 익은 산딸나무 열매는 요즘 텃새들에게 좋은 먹이다. 우리동네에 있는 산딸나무는 유난히 열매가 커 탁구공 만한데, 직박구리들이 잔치를 벌이느라 신이 났다. 열매 모양이 딸기를 닮아 산딸나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데 실제로 먹어보면 달착지근한 맛이 난다. 산딸나무와 가까운 친척이어서 잎 모양만으로 구분이 어려운 산수유는 길쭉한 붉은 열매를 다음해 봄까지 주렁주렁 매달아 멋진 경관을 선사한다.

그림 4산딸나무 열매. 딸기모양 비슷한데 달착지근한 맛이 난다.

그림 5산수유 열매. 산딸나무와 잎은 비슷하지만 열매는 많이 다르다.

도심 소공원 등에 조경수로 많이 심는 덜꿩나무는 콩알 만한 붉은 열매가 총총하게 모여 덩어리를 이룬 모양이 참 탐스럽다. 들의 꿩이 이 열매를 좋아한다고 해서 들꿩나무로 불리다가 덜꿩나무로 변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중부이남 지역 야산에서2~3m 정도로 자라는 나무인데 꽃과 열매가 아름다워 조경수로 사랑 받고 있다. 인척인 가막살나무와 꽃과 열매가 아주 비슷해 구분하기 어렵지만 잎자루가 가지에 거의 붙을 듯 짧고 턱잎이 있으면 덜꿩나무다. 꽃피는 시기도 좀 다른데 5월 초에 핀 덜꿩나무 꽃이 질 즈음 가막살나무 꽃이 피기 시작한다. 꽃에서는 밤꽃 향과 같은 특이한 향기가 난다.

그림 6도심 소공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덜꿩나무 열매. 과육이 풍부해 새들에게 좋은 겨울 먹이가 된다.

붉은 열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피라칸사스다. 피라칸다라고 하는데 알알이 붉은 열매가 맺힌 모양은 마치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화려하다. 원래 따뜻한 지역 식물이라 남부지방이나 제주, 서해안 도서지역에 많았지만 요즘은 서울에도 조경수로 심기 시작했다. 5~6월에 유백색 작은 꽃이 핀 자리마다 빽빽하게 열매가 열린다. 가지에는 잔 가시가 있어 조경용 외에 생울타리용으로 많이 심는다.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새빨간 열매를 잔뜩 단 피라칸사스가 줄지어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그림 7피라칸사스.

원래 높은 산 능선 부근에서 자라는 마가목도 빨간 열매가 아름답다. 봄에 돋는 새싹이 말의 이빨 모양 같다고 해서 마가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데 요즘 가로수와 정원수로 많이 심어 도심에서도 심심치 않게 마주친다. 말린 열매는 약재로 귀하게 쓰인다. 유백색 꽃이나 붉은 열매는 피라칸사스와 많이 닮았다.

그림 8높은 산 능선 부근에 자라는 마가목의 열매. 요즘은 가로수로 심어 도심에서도 볼 수 있다.

요즘 가을 도심과 산야에는 그 외에도 제철 맞은 각종 열매들로 넘쳐난다. 관목류인 낙상홍과 매자나무는 조경용과 생울타리용으로 개발돼 아파트 화단 같은 곳에서도 앙증맞은 빨간 열매를 감상할 수 있다. 역시 관목류인 작살나무 보라색 열매는 어디서 저런 고운 색깔이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예쁘다. 큰키나무인 팥배나무의 열매는 잎이 진 뒤 나무 전체를 뒤덮어 멀리서 보면 마치 분홍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 이 가을, 단풍이 시시하다고 실망할 게 아니라 일상 주변의 나무 열매들을 찾아 나서보자.

그림 9화단에 많이 심는 낙상홍의 열매.

그림 10잔 가시가 억센 매자나무(왼쪽)는 화단의 낮은 생울타리로 애용된다. 보라색 열매가 앙증맞은 작살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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