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남중국해 충돌로 아세안 국방장관 '공동선언문' 불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4일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의 기존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긴 하지만 남중국해의 영유권을 놓고 맞서는 미국과 중국의 국방장관이 모두 참석한 국제회의에서 사실상 미국의 손을 들어준 만큼 향후 한중관계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한민구(오른쪽 7번째)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아세안 10개국과 아태지역 8개국 국방장관들이 4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방부제공

한 장관은 이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진행된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 본회의 연설에서 “한국 정부는 남중국해에서의 항해와 상공비행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고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은 자제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밝혔다. 한 장관은 이어 “남중국해 지역은 대한민국 수출 물동량의 30%, 수입 에너지의 90%가 통과하는 중요한 해상교통로로서 우리의 이해관계가 큰 지역”이라며 “분쟁은 관련 합의와 국제적으로 확립된 규범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박근혜 대통령이 앞서 2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남중국해 분쟁에 대해 밝힌 내용과 다를 바 없다. 외교부가 누차 밝혀온 기본 입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정부 고위관료가 미국, 중국을 비롯해 남중국해 분쟁당사국이 모두 참여한 다자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라서 발언의 무게감은 이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한 장관의 연설이 끝나자 중국 측은 “우리의 조치들은 항해나 비행의 자유를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장하고 있다”며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20분간 진행된 한중 국방장관회담에서는 남중국해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다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특히 이번 회의는 미중 양국이 남중국해 문제로 정면 충돌하면서 공동선언문을 채택하지 못하고 끝나는 초유의 사태를 빚어 미중 갈등이 심화하는 양상이다. 2002년 채택한 남중국해 분쟁당사국 ‘행동선언’을 구속력을 갖춘 ‘행동수칙’으로 격상해 공동선언문에 반영하려고 했지만 중국이 강력하게 반대하며 무산시킨 탓이다. 행동수칙에는 유엔 해양법을 포함한 국제법에 따라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일본 호주 등은 미국 편을 들었고,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미얀마 등 일부 아세안 국가들은 말을 아낀 채 암묵적으로 중국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에는 아세안 10개국과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등 아태지역 8개국 국방장관이 참석했다.

이날 본회의에 앞서 미중 양국 국방장관은 직접 만나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3일(현지시간) 열린 양자회담에서 창완취안(常萬全) 중국 국방부장은 미 함정이 최근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에 있는 중국 인공섬의 12해리 안쪽으로 진입한 것을 지적하면서 “미국이 일체의 잘못된 언행을 중단하고 다시는 중국의 주권과 안전이익을 위협하는 어떤 위험한 행동도 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며 “남중국해에 있는 여러 섬은 조상들이 물려준 중국의 영토”라고 역설했다.

이에 맞서 애슈턴 카터 장관은 “중국이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 것을 중단할 것을 희망한다”면서 “미국은 국제법이 허용하는 어느 곳에서나 작전을 계속할 것이며 남중국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한편 한 장관은 회의장에서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과 조우했지만 악수도 하지 않은 채 냉랭하게 지나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한일 국방장관회담에서 “한국 영토는 휴전선 이남”이라는 나카타니 방위상의 발언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한 장관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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