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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자기색정적 사회

입력
2015.10.3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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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의 저자 한병철은 성과사회에서는 이전의 규율사회와 달리 명령하는 자(권력)가 없다고 말한다. 명령하는 권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과사회가 규율사회보다 더 잘 돌아가는 것은, 성과사회가 ‘할 수 있다’라는 긍정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가 쓴 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주장은, 이 달에 나온 ‘에로스의 종말’(문학과지성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명령하고 착취하는 타자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체는 자기 자신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이다. 착취자는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성과에 중독된 사회에서는 이재용이나 삼성의 평사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은 부정성을 모르는 환우(患友)이자, ‘디지털 계급’으로 통폐합 되었다. ‘심리정치’(문학과지성사, 2015)에 단 한번 언급되었던 ‘디지털 계급사회’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 경쟁하는 사회다. 장구한 역사가 만들어 놓은 계급사회는 피라미드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넓은 저변에서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구성원이 적어진다. 계급투쟁과 혁명이 벌어지는 이유도 알고 보면 누구나 차지하고픈 피라미드 상층의 자리가 희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행이나 신용카드사가 발급하는 최우수고객등급(VVIP)은 제한 없이 무한하다(은행과 신용카드사에게 VVIP는 다다익선이다). 친구의 카드가 나보다 등급이 높아서 질투가 날수는 있겠지만, 카드 등급에 관한한 두 사람은 의자 뺏기를 벌이는 경쟁자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각자 좀 더 높은 디지털 계급으로 오르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한다. 이처럼 자기색정적인 사회는 개인을 효율적이게 하지만 서로간의 연대는 생겨나지 않는다.

군대가 그렇다지만, 소년원에서도 보름마다 한 번씩 주말이면 오락회를 한다. 대빵(대장)은 말한다. “오늘 너희 마음대로 한번 놀아봐!” 그러면 쪼다(아랫것)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춤추고 노래한다. 한병철의 논리대로라면 바로 이들이 성과주체이며, 오락시간 동안 권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쪼다들은 오락회를 하는 내내 대빵의 심기를 의식한다.

아니나 다를까, 오락회가 끝나면 대빵이 말한다. “마음대로 놀아보라고 했는데, 이거 밖에 못 놀아?” 그리고 화장실로 올라가서 줄줄이 빳다를 쳐 맞는다. 이유는 달리 있지 않다. 다른 반(班)보다 ‘더 신나게’ 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성과주체는 결코 지배 없는 착취를 당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들이 아니다. 이들의 자기착취는 노동자의 권리가 지켜지거나, 노동조합만 있어도 웬만큼 막을 수 있다.

한병철의 사유와 글쓰기의 압도적인 특징은 ‘거인의 어깨 위에 앉기’와 ‘숟가락 얹기’다. 보통 남의 사유를 빌려오면 짜깁기한 바늘땀이 보이는데, 그에게는 ‘황금 뜨개질 상(賞)’을 주어야 할 만큼 봉합선이 보이지 않는다. ‘에로스의 종말’에 서문을 쓴 알랭 바디우도 이 점을 인정한다. “이 책의 대단한 매력은, 어떤 철학적 일관성과 엄격함이 아주 다양한 출처에서 끌어낸 풍부한 묘사와 희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에로스의 종말’은 ①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새’(나르시시즘적 주체는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한다)와 ②김종서의 ‘아름다운 구속’(타자에 의해 나의 동일성이 깨어지는 경험이 사랑이다)을 들으면 더 잘 이해가 된다. 성과사회의 자기색정적 주체가 ①로 퇴행하여 ②의 가능성을 완전히 가로막으면 에로스도 끝난다. 이 흔한 설명에 한병철이 얹어주는 덤은,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 역시 에로스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②를 감수하면서 ①을 물리치는 행위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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