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목소리’라는 단체가 지난 14일자 월스트리트저널에 게재한 전면광고. 월남전 파병 한국군의 성범죄에 대해 박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공공 도서관이 발달했다. 워싱턴DC 인근 기자가 사는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도 마찬가지다. 한인이 많은 애난데일 지역 조지메이슨 도서관에는 1,000여권의 국문 서적까지 있다. 그 중에는 한국에서 즐겨 보던 고 박완서 작가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도 있다. 1951년 1.4후퇴 이후 휴전까지 한국인의 신산(辛酸)했던 삶을 그린 자전적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것들끼리만 따로 모여 사는 동네가 있는데 이번엔 거기까지 들어갔지요. 왠 왜예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구지요. 그것들도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그 짓 한 걸 우리는 바가지를 씌워서 벗겨 먹었으니, 누구 짓이 더 더러운 짓인지는 아마 하느님도 헷갈리실 걸요. 그 바닥에서도 따돌림을 당해서 그런지 그것들은 보통 양갈보들보다 더 어수룩하고 인정도 있어요.”

당시 20대 초반인 박 작가 올케가 기지촌을 돌며 옷을 팔다가 시어머니와 대립하는 장면이다. 교육깨나 받았을 중산계층이나 하층민이 너나 없이 힘들고, 거친 세파를 몸 팔아 견뎌야 했던 이들의 슬픔이 녹아난다.

현대사의 불행했던 순간을 얘기한 건 ‘어수룩하지만 인정도 있다’던 기지촌 여성이 워싱턴의 한ㆍ일 역사전쟁에서 일본의 공격 무기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면, 일본은 기지촌 여성을 들먹이며 초점을 흐린다. ‘너희들도 과거에 비슷한 일을 저질렀는데, 왜 우리만 몰아붙이냐’는 논리다. ‘국가 권력이 양민을 강제 납치한 것과 기지촌 여성은 다르다’고 반박하면, 그들이 꺼내는 자료 중 하나가 <동맹 속의 섹스:한미관계에서의 군대 성매매>라는 논문이다.

놀라운 건 저자가 워싱턴 싱크탱크 브루킹스의 ‘한국학 석좌’(캐서린 문 박사)라는 점이다. 언론 인터뷰 등을 종합하면 문 박사는 ‘군의 관여가 더 직접적이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일본군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은 다르지 않다’는 입장이다. 최근 ‘박근혜 정부의 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잘못됐다’고 주장했다는 그에게는 학자적 양심에 따른 소신이겠지만, 역사 전쟁을 벌이는 우리 외교관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일본은 박 대통령 방미 기간 중에도 역사 도발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된다’고 한 건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월남전 파병 한국군의 성범죄 사례도 위안부 문제 희석에 이용하고 있는데, 박 대통령이 워싱턴에 머문 지난 14일 ‘베트남의 목소리’라는 단체가 프레스센터에서 박 대통령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다. 광고 단가가 우리 돈으로 1억원에 육박하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전면 광고도 게재했다. 피해자로 추정되는 베트남 여성4명의 사진 아래 박 대통령이 거수 경례하는 모습을 담은 뒤, ‘박 대통령, 우리는 강간 당했다. 이제 당신이 사과해야 할 때’라는 문구도 있었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이 단체가 최근 활동을 시작했고, 기자회견장에 평소 일본과 가까운 미국 인사가 참석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 단체 배후에 박 대통령의 방미를 흠집 내려는 배후 세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 여부를 둘러싸고 국론 분열 수준의 논쟁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국정 교과서는 ‘친일ㆍ독재 미화’, 기존 검정 교과서는 ‘좌 편향’으로 비난 받는다. 그러나 워싱턴에서는 오래 전부터 불행한 현대사를 둘러싸고 한일간 치열한 역사 전쟁이 진행 중이다. 역사 전쟁의 전황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이후 역사 수정주의적 태도를 강화한 일본의 뻔뻔한 공세로 곳곳에서 우리 전열이 위협받는 형국이다.

어쭙잖은 명분은 접어 두고, 현대사 부분에서만이라도 우리 내부에서는 정교하고 일치된 목소리를 만들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chcho@hankookilb.com

인기 기사

api_db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