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혼자 살아가기 어려운,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길 원하는 존재다. 외롭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가족에서 사회에 이르는 공동체들을 발명해 왔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사회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를 연대(solidarity)에서 찾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인들이 각자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여러 조직에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다는 연대의 느낌과 의식은 현대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핵심 요소다.

연대를 중시하는 공동체주의는 보수와 진보가 공유하는 사상이다. 보수는 공동체에 내재한 전통의 가치에 주목하고, 진보는 공동체 안에서의 사회적 약자 보호를 강조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이 타자와의 상호작용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 삶을 진행하며, 그 관계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이다. 1990년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기회’와 ‘책임’에 더하여 ‘공동체’를 새로운 가치로 내걸었을 때, 보수와 진보를 떠나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공동체주의는 서구보다 동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에 가까운 사상이다. 유교에 담긴 가부장주의나 차별의식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통합을 위한 공동체를 중시하는 유교 철학을 일방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공감한다. 예를 들어, 율곡 이이가 ‘성학집요’에서 ‘예기’를 인용해 “늙은이는 종신할 곳이 있고 젊은이는 쓰일 곳이 있으며 어린이는 자랄 곳이 있고 (…) 병든 자와 불구자 모두 부양될 곳”이 있어야 한다고 제시한 대동사회론(大同社會論)은 여전히 주목 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현재다. 지난 20여년 간 우리 사회의 기본 틀을 만들어온 것은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등장한 이른바 ‘97년체제’다. 이 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개인적 차원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사회적 차원의 신자유주의 공고화에 있다. 이 체제에선 끝없는 경쟁을 강요 받는 개인만 존재할 뿐, 위기에 처한 개인을 보호할 공동체는 약화돼 왔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눈여겨봐온 지표의 하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매년 발표하는 ‘사회 연계 지원’에 관한 국제 비교다. 며칠 전 발표된 2015년 자료에 따르면,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지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 연계 지원 부문에서 우리나라는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꼴찌(72.37점)를 기록했다. 특히 50대 이상의 점수는 1위인 아일랜드(96.34점)보다 무려 30점 가량 낮은 67.58이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친구와 친지가 얼마나 있는지를 한번 자문해 보길 바란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내가 느끼는 아이러니는 두 가지다. 흔히 개인주의가 과도하게 발전한 서구사회의 사회적 관계망이 외려 긴밀하다는 게 하나라면, 공동체주의에 익숙한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고립도가 더 높다는 게 다른 하나다. 짧게는 외환위기 이후, 길게는 산업화 이후, 생태론자 안승준이 일찍이 지적했듯, 공동체의 급격한 붕괴는 우리 모더니티의 그늘인 셈이다.

고립무원의 관계를 낳은 원인으로는 경제적 양극화에서 문화적 단절, 그리고 지나친 경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대다수 사회적 관계는 기실 임시적이고, 혈연에 기반한 가족만이 의미 있는 관계이며, 나이가 들면 그 가족마저 멀어지면서 결국 혼자만 남게 되는 사회가 바로 한국사회이지 않을까. 앞의 통계가 보여주듯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 사회는 그동안 일궈온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사회통합을 원점에서 다시 성찰하고 국가와 사회를 재설계해야 한다.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남은 오늘날의 미국사회를 ‘나 홀로 볼링’이라고 은유한 바 있다. 팀을 이루는 게 아니라 혼자서 고독하게 치는 볼링은 사회적 연대가 약화되고 개인적 고립이 증가해온 것을 함축한다. 나 홀로 산책, 나 홀로 티브이 보기, 나 홀로 밥 먹기 등을 포함한 ‘나 홀로 사회’는 결코 소망스러운 미래가 아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인 정호승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동시에 외로우니까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역시 대단히 소중한 가치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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