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원풍경은 모든 것이 물들어가는 때다. 초록생명의 시간을 질주하듯 달려와 자신의 결과물을 내려놓고 텅 비어가는 가을 들판을 바라본다. 한 해의 시간 동안 사과나무는 주렁주렁 사과를 키워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가시갑옷으로 열매를 보호한 늙은 밤나무도 입을 벌려 야무진 알밤을 툭툭 내어놓았다. 들판의 곡식도 산 속 머루 다래도 모두 시간 앞에 자랑스런 결과물을 내놓고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때에 왜 이렇게 내 몸과 마음의 곳간은 텅 빈 것처럼 허전하여 초대받지 못한 잔치 집 빈객처럼 왜소해지는가!

계절이 바뀔 때면 며칠씩 심한 몸살을 앓곤 한다는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인으로도 여러 곳에서 상찬을 받는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웃으면서 “참 낭만적인 병을 앓고 있네!” 농담으로 혹은 감성의 섬세함을 보이고자 하는 엄살쯤으로 들어 넘겼다. 갑자기 그가 그리웠다. 전화기 속의 그 목소리는 평온하고 친근했다. “요즘은 그 계절병 안 도지나?”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너무 외진 데로 가서 친구도 없고 그러니 사람도 사귈 겸 주말에 풍기 읍내로 좀 나오쇼!”

그의 말인 즉 마침 시인들 모임인 축구단과 풍기의 한 친목단체가 주말에 중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니 한 번 와서 얼굴도 보고 새 사람들도 만나고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이 한마디 말에도 나는 ‘가볼까? 말까?’를 몇 번이나 되새겨 고민하는 소심함, 혹은 자격지심이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친한 이들도 있고 설령 모르더라도 지면으로는 알고 있는 이들이지만 그래도 모임이라는 자리는 늘 내게 이렇게 큰 망설임을 준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을의 쓸쓸함이 결국 봉화에서 풍기까지 나를 이끌고 갔다. 파란 하늘. 플라타너스 잎이 팽그르 돌며 떨어지는 벤치에 앉아 야! 야! 소리 지르며 공을 차는 배 불뚝한 중년들의 풍경이 정겹고 어린 날의 운동회처럼 아득했다. 공을 차고 있던 친구가 구석에 앉아 있던 나를 쳐다보고 손짓을 하며 저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있으라 했다. 거기엔 공을 차지 않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미 종이컵에 막걸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번 자리에서 술은 먹지 말아야지 한 결심은 어디 가고 예! 선생님을 연발하며 막걸리를 받아먹고 있는 자신을 보았을 때는 이미 빈 병 몇 개가 바닥에 뒹굴었다. 속으론 이거 안 되는데 하면서도 손은 불쑥불쑥 앞으로 내미는 막걸리 잔을 부여잡았다. 영주의 한 시인이 마련한 회식자리로 옮겼을 때에는 몇몇 ‘선생님’은 이미 ‘형님’이 되어있었다. 더 발전하면 처음엔 아우님 했던 호칭이 야!로 바뀌게 생긴 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일시에 모였다 뿔뿔이 흩어지는 모임이여. 모임의 속성이여.

물론 처음 예의를 지속하기 어려운 것이 모임이고 형식을 파괴시켜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종종 만드는 것이 회식이지만 문제는 항상 그 결과에 똑같이 공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의 소심증은 다음 날 새벽 이불 속에서부터 뒤척이며 꿈틀거렸다. 나는 왜 좀 더 나아지지 못하는가. 자신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이들 앞에서 품위로 대등하게 대접하지 못하고 이죽거리고 냉소하여 스스로를 조롱하는가.

뒤척뒤척 자신을 자책하고 변명하고 부끄러워하는 사이 검은빛에서 옥빛으로 동편을 물들이던 해가 장군봉 능선으로 눈부시게 솟아올랐다. 정 동향인 집 유리창을 통과한 빛이 거실 바닥을 햇빛 방석으로 만들었다. 어제를 훌훌 털어버리고 오늘의 일기를 쓰라고 밝고 맑은 곳으로 나를 인도한다.

커피 가루를 넣은 잔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물과 커피가 서로에게 물들어 향기를 뿜는다. 거실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간다. 서늘한 바람이 폐에 들어온다. 해발 칠백 미터의 눈앞에 펼쳐진 첩첩한 능선의 물결이 어제보다 넓게 퍼졌다. 하루하루 바라볼 때는 물드는 속도를 모른다. 어느 날 문득 저 풍경이 온통 붉어졌을 때 흘러가버린 한 날들의 소중함과 무게를 안다.

저 바람과 이슬과 고독한 나무가 서로에게 물들어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주듯, 사람과 사람도 서로에게 물들어 위로를 주는 가을이면 좋겠다.

정용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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