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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깨치니 당당… 여든이지만 마음은 열아홉 소녀"

입력
2015.10.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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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개 한글 배움터 작품 170편 엿보니

가난의 기억·못 배운 한·배움의 열정 담겨

시인·운전면허증 등 또 다른 꿈 '무럭무럭'

삐뚤삐뚤 써내려 간 할머니의 시화작품을 소개한다. 이제 막 한글을 깨우치기 시작한 이들의 시구는 투박하고 표현은 서툴다. 매끄러운 표현도 특별한 사연도 없지만 작품에 담긴 진솔한 사연들이 뭉클한 감동을 준다. 나이는 여든이지만 한글을 배우러 나서는 발걸음은 오늘도 열아홉 소녀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주렁주렁/콩 밭에 콩이 알알이/학교에 가면/내 머리에도 글자가 주렁주렁/공부도 알알이 되있으면 좋겠다” (고재선 ‘공부도 밭일처럼’)

글자를 탐스런 포도 알갱이에 비유한 시인은 아이가 아니다. ‘내 머리에도 글자가 주렁주렁’ 매달리는 상상은 뒤늦게 한글 깨치기에 나선 64세 할머니의 작은 소망이다. 이 작품은 지난해 9월 부산에서 열린 제12회 전국 문해한마당 글쓰기대회에서 ‘아름다운글상’에 선정됐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전국 60여 개 한글 배움터에서 할머니들이 창작한 시화작품 170여 편을 입수해 만학의 소회를 엿보았다. 각각의 작품마다 찢어지는 가난의 기억이나 글을 모르는 설움, 그리고 배움의 열정과 희망이 알알이 담겼다. 투박하고 서툴지만 솔직한 표현이 미소를 부르고, 시련을 이겨낸 할머니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가슴은 뭉클해진다. 김인숙 전국문해·기초교육협의회 대표는 “우리나라 성인 중 한글을 읽지 못하거나 읽어도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문해자가 전체의 6.4%인 264만 명에 달한다. 문해교육의 활성화를 통해 이들의 학습권리를 찾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9일은 569돌 한글날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이 걸어온 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럿의 사연이 곧 한 사람의 인생이고 그의 이야기는 다른 이들의 삶과 통해있다. 지나온 인생에서 할머니들이 가장 또렷하고 애절하게 묘사한 기억은 한글을 알기 전 매사에 웅크려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다. 사실,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설움은 지독한 가난으로부터 시작됐다. 꼼꼼히, 그리고 담담하게 회상해 낸 그들의 지난날은 하나 같이 우울하다. 딸의 권유로, 조카의 소개로 식당 일을 그만두고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낯설고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 배움의 문을 두드렸다. 그 옛날 배움의 기회를 주지 못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마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아이처럼 편지 속에서 어리광도 부려본다. 마침내 시작한 공부, 더디지만 하루하루 한글을 깨우치는 기쁨, 행간엔 감사와 행복이 넘친다. 만학의 꿈을 이룬 지금 그들의 마음은 또 다른 희망으로 부풀고 있다. 글이 보이니 미래가 보이고 자신이 보인다는 할머니들의 꿈은 소박하지만 단단하다.

<시화작품 발췌분 모음>

“아이 낳고 출생신고를 하러 간 날 나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손도 떨리고 얼굴은 빨개지고 말도 못했다. 다행히 친절한 직원이 나를 도와줬지만 너무 고맙고 창피해서 눈물이 났다” (박경자 ‘늦게 이른 내 소원’)

“하나밖에 없는 딸이 동화책을 읽어달라 했을 때 못 읽어준 일,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외국영화도 볼 수 없었던 일,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도 노래를 찾지 못했던 일, 남들에겐 별 일 아닌 일들이 나에겐 상처였고 슬픔이었다” (황광순 ‘당당한 발걸음’)

“죄인도 아닌데 죄인처럼 살고 오랜 세월 깊은 터널 속에서 어둡게 살았다” (이숙자 ‘이제는 행복합니다’)

“말하지 못하시던 아버지와 평생 지병과 싸우시는 어머니 사이에서 육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과 가난의 굴레, 내 인생 육십 년에는 단 한 순간도 학교 근처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조성순 ‘까맣눈’)

“물동이 머리에 이고 친구들 학교 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인지 물동이에서 흐르는 물인지 얼굴에 흐르는 물을 닦으면서 한 없이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던 나였지요.” (배영희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에…’)

“왠지 이대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여 제대로 배워 사람답게 살아봤으면 하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정순용 ‘세상에 당당히 맞설 때까지’)

“시민학교 들어서는 입구에서 가슴이 콩닥콩닥. 나 같은 사람 또 있을까 했는데 나 같은 사람 여기 다 모였네.” (임희령 ‘나도 쓸 수 있어요’)

“학교에 다니게 되어 간판도 볼 수 있고, 봉사가 눈을 뜬 기분입니다” (문병부 ‘어린시절’)

“못 배운 한글 깨치니 자신감도 쑥쑥 당당함도 쑥쑥 혼자서도 잘해요” (김금옥 ‘당당함’)

“은행에 가서 도움 없이 돈을 찾는다. 혼자 전철을 탈 수도 있다. 7살 손녀 수경이에게 한글을 가르쳐준다.” (이영애 ‘배우는 기쁨’)

“나 받아쓰기 100점 맞았어요! 이제 나 못 가르친 거 미안해 하지 마세요.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엄마 아부지 이름 멋지게 써 드릴게요” (황광순 ‘당당한 발걸음’)

“이제 공부를 더 하고 싶다. 소설책도 많이 보고 싶다. 손주한테 편지를 쓰고 싶다.” (심갑례 ‘배운게 참 좋다’)

“글을 몰라서 운전면허 시험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한글을 배우고 있다. 열심히 배워서 면허증을 따겠다. 꼭 따서 당당하게 운전을 하고 전국 일주를 하겠다.” (정옥순 ‘운전면허증’)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책을 재미있게 읽어주고 싶어요.” (최경자 ‘나는 행복한 사람’)

“손자한테 학교 갔다 올게 하고 나오면… 내 마음은 열아홉 소녀랍니다. 나이는 팔십이지만 발걸음은 열아홉 살입니다”(강권이 ‘열아홉 소녀’)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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