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관심한 자들을 미워한다.”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정권 하에서 저항운동을 펼쳤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남긴 말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와 이 현실세계가 지닌 문제들이 극복되는 ‘이상세계’ 사이에는, 언제나 커다란 거리가 있다. 현실세계와 이상세계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다는 것은, 이 세계에 여전히 불의, 불공평, 불평등,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람시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과정에서 걸림돌 중의 하나가 ‘무관심’한 사람들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무관심자’가 아닌 ‘관심자’가 되는 데에 필요한 것 들은 무엇일까. 그 중의 하나는 불의한 것에 대한 ‘분노’이다. 이러한 ‘불의에의 분노’는 이 세계에 대한 ‘책임적 관심’이며 ‘변혁에의 열정’이기 때문이다.

흔히 ‘분노’라는 개념은 매우 부정적으로 간주된다. 특히 개인들의 권리보다는 가족, 학교, 직장 등 공동체의 ‘조화’를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하는 한국 같은 사회에서, 개인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분노’의 감정은 공동체 안의 ‘조화’와 대치되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러나 모든 분노를 하나로 묶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분노’에는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노들의 양태는 대략 본능적 분노, 성찰적 분노, 그리고 파괴적 분노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본능적 분노’란 자신에게 가해진 어떤 외적 위협에 대한 ‘즉각적 분노’이다. 이러한 본능적 분노는 사람은 물론 동물들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뱀이 개를 물려고 할 때, 그 개는 뱀을 향해서 으르렁거림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드러낸다. 이러한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분노는, 자기보호본능에서 유발되는 것으로서 윤리적 성찰이 개입되기 이전의 분노이다.

둘째, ‘성찰적 분노’는 어떠한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윤리적 분노’를 하는 것이다. 이 ‘성찰적 분노’는 어떠한 사건이나 행위에 대하여 부당함, 불의함, 불공평성 등에 대한 분석이 있은 후, 그 분석에 따른 윤리적 판단이 반영되는 ‘윤리적 분노’이다. 즉, 상황에 대한 ‘포괄적 분석,’ 그 분석에 근거한 ‘윤리적 판단,’ 그리고 그 판단에 근거한 ‘행동’의 과정을 거쳐서 가지게 되는 숙고된 분노이다.

셋째, ‘파괴적 분노’가 있다. 이 ‘파괴적 분노’는 본능적 분노나 성찰적 분노가 지나칠 때 증오, 원한, 복수심으로 전이된 분노이다. 즉 증오, 원한, 복수심으로 변모되는 이 분노는 ‘반(反)윤리적 분노’이다. ‘성찰적 분노’와 ‘파괴적 분노’를 종종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분노는 그 동기, 과정, 결과에서 매우 다르다. 이 둘 사이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그 분노의 대상에 달려있다. 성찰적 분노는 ‘부당한 행위’ 자체에 초점이 있지만, 파괴적 분노는 그 ‘행위자’를 향하면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맹목적으로 부정하고 증오하고, 급기야는 ‘악마화’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자신은 물론 누군가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과 부당한 대우의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연대를 통해서 불의하고 불평등한 일들이 개선되고, 더욱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서 진일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종 연대하는 이들이 ‘성찰적 분노’와 ‘파괴적 분노’를 분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약자들과의 연대의 이름으로’ 또는 ‘정의의 이름으로’ 부당한 행동을 한 사람 자체를 ‘악마화’하고,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증오를 표출한다. 특히 소셜 미디어가 일상화된 현대세계에서 어떤 사람을 ‘악마화’하고 증오하는 ‘파괴적 분노’는 손쉽게 퍼진다. 부당한 ‘행위’ 자체에 대한 ‘윤리적 분노’가 아니라, 그 행위자에 대한 악마화와 극단적 증오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윤리적 분노’는 그 분노의 대상을 ‘사회적 죽음’은 물론 ‘육체적 죽음’으로까지 내몰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파괴적이다. 또한 이러한 파괴적 분노는 타자는 물론 자신의 ‘인간됨’까지 파괴하는 독성을 지닌 분노이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배워야’ 하는 분노는 ‘성찰적 분노’이다. 누군가가 불의한 행동을 했을 때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성찰적 분노’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성찰적 분노’가 주는 두 가지 중요한 이득이 있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의 이득이다. ‘성찰적 분노’는 폭력적 상황으로부터 개인들을 보호하고 자기 존중감을 유지하게 한다. 자신에게 부당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아무런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개인 속에 지켜낼 자존감도 남아 있지 않거나 무엇이 부당한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공적 차원에서의 이득이다. ‘성찰적 분노’에 의한 문제제기와 항의를 통해서, 잘못된 일을 하는 이들의 개선과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정의의 집행’이 가능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적 분노는 불의한 일을 한 개인이나 집단을 처벌하고 개선하게 하는 효과도 있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유사한 잘못을 하지 못하도록 서로를 보호하는 의미도 될 수 있다.

그람시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생충처럼 ‘기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무관심’은 인간의 지성을 파괴하면서 역사 속에서 더욱 나은 세계에 대한 최선의 계획들을 뒤틀고 망가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더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위한 변화에 ‘관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관심이라는 병’을 지니고 살아가는 ‘기생의 삶’을 거부하고 ‘인간으로 사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성찰적 분노’를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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