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성의 일상 속 자연누리기(6)

왕귀뚜라미 한 마리가 낙엽 사이로 숨어들고 있다.

요즘 퇴근길은 귀뚜라미 악사들의 연주가 있어 심심하지 않다. 대로를 벗어나 동네 골목길로 접어들면 그들이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귀릭 귀릭 귀릭~’ 하기도 하고, ‘끼끼 끼끼끼끼~’ 로 들리는 소리도 있다. 앞엣것은 극동귀뚜라미 소리이고, 뒤는 알락귀뚜라미 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귀뚜라미 종류는 30종이 넘는데 그 가운데 서울에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게 극동귀뚜라미와 알락귀뚜라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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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귀뚜라미(네이버·한국산 산림서식 메뚜기 도감). 알락귀뚜라미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쉽게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들은 생존력이 뛰어나서 삭막한 도시 어느 곳에서도 살아간다. 덕분에 우리 도시인들은 교외나 시골에 가지 않아도 이 가을 귀뚜라미 소리를 즐길 수 있다. 도시 주택가라도 풀섶이 우거진 곳에서는 더 아름다운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귀뚜라미 종류 중 몸체가 가장 커 왕귀뚜라미라고 불리는 녀석으로, ‘귀뚜루루루~’하고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 기타 줄을 고를 때 나는 맑은 소리 비슷하다. 가장 전형적인 귀뚜라미 소리라고 할 수 있는데, 대도시 지역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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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락귀뚜라미(네이버·한국산 산림서식 메뚜기 도감).

귀뚜라미 종류 중에 풀종다리라는 녀석도 있다. ‘키리리리리리~’하고 긴 호흡으로 우는데 약한 착암기 소리처럼 들린다. 주로 낮에 울어 아침 출근길에 귀를 붙잡는다. 이 녀석은 몸집이 작고 나무 가지 사이에 교묘하게 붙어 울기 때문에 낮이라도 좀처럼 모습을 보기 어렵다. 어떻게 귀뚜라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풀종다리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손석희 JTBC사장이 MBC근무시절 파업을 주도하다 옥살이한 경험 등을 담아‘풀종다리의 노래’라는 책을 썼는데 만날 기회가 있으면 풀종다리 이름 유래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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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종다리(곤충생태원). 나무가지 사이에 숨어 키리리리~ 하고 운다.

귀뚜라미과에 속하는 긴꼬리는 귀뚜라미보다는 여치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몸 색깔은 연두색조다. 푸른 잎사귀 뒤에 숨어 우는데‘러러러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들으면 코롱코롱코롱~ 으로도 들린다. 소리에서 분명히 ㅋ 과 ㄹ 음가가 느껴지지만 흉내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긴꼬리는 큰 잎사귀에 구멍을 내 머리만 살짝 앞으로 내밀고 잎 뒷면 꼬리 부분의 날개를 세워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미물이지만 큰 잎사귀를 공명시켜 소리를 키우는 지혜가 놀랍다. 요즘 밤 교외에 나가면 수많은 긴꼬리의 합주가 대단하다. 서울의 양재천변 같은 좀 한적한 곳에서도 긴꼬리 연주를 들을 수 있지만 개체수가 많지 않아 대개는 솔로 연주다. (여러종류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싶다면 ▶ 곤충생태원 들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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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는 날개를 비벼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오른쪽 날개에 있는 날카로운 돌기로 왼쪽 날개의 마찰판을 비비는데 바이올린 켜는 원리와 같다. 가슴의 진동막을 울려 소리를 내는 매미가 관악기라면 귀뚜라미는 현악기라고 할 수 있다. 매미 종류나 귀뚜라미 종류 모두 소리를 내는 것은 수컷이다. 짝짓기를 위해 아름답고 우렁찬 세레나데, 연가(戀歌)로 암컷을 유혹하는 것이다.

수컷 귀뚜라미들은 풀섶 땅 속에 작은 굴을 파고 들어 가거나 계단, 돌 밑 작은 공간에 숨어 운다.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공명을 통해 우는 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해서다. 크고 우렁찬 소리라야 암컷이 찾아온다. 보다 좋은 후손을 남기기 위한 생명체들의 진화적 장치이다. 그런데 크고 강한 소리를 내는 수컷 근처에 숨어 있다가 암컷이 다가오면 냉큼 올라타 짝짓기를 하는 얌체 녀석들도 있다고 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건 귀뚜라미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귀뚜라미 소리로 기온을 잴 수 있는 공식이 있다. 25초 동안 우는 횟수를 3으로 나눈 뒤 4를 더하면 섭씨 온도가 나온다고 한다. 예를 들어 25초 동안 48회를 울었다면 48/3+4=20도가 된다. 하지만 막상 귀뚜라미 소리를 들어보면 어떻게 일정 시간에 우는 횟수를 잰다는 것인지 난감하다. 알고 보니 실험에 이용된 것은 일반 귀뚜라미가 아니고 긴꼬리였다. ‘러러러러~’ 하고 규칙적으로 우니까 ‘러’ 소리를 세면 되는 것이다.

귀뚜라미를 가을의 전령이라고 하지만 실은 귀뚜라미가 가장 왕성하게 우는 시기는 장마가 끝난 직후인 7월말부터 8월 중순 경이다. 대부분의 풀벌레들이 그렇다. 일년 중 가장 온도가 높은 이 시기는 풀벌레들의 발음기관들이 팽팽해져 더 높고 우렁찬 울음소리를 낸다. 여름 휴가철 밤에 야외에 나가면 여치와 베짱이, 귀뚜라미 종류 등 온갖 풀벌레 소리로 가득하다. 수컷들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저마다 혼신을 다해 세레나데를 부른다. 아니 바락바락 악을 쓴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지휘자 없이 각자 자기 연주에 몰두하는‘제멋대로 풀섶 관현악단’이다. 하지만 귀 기울여 들으면 가슴을 울리는 자연의 교향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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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기에 비하면 10월 초의 요즘 풀섶은 조용한 편이다. 추석 연휴 지나고 밤 기온이 뚝 떨어지자 귀뚜라미 소리가 한층 청아해졌다. 그 소리를 듣노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 앉는다. 때로는 싱숭생숭해지기도 하고 누군가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짝을 부르는 세레나데이니 구슬플 이유가 없지만 우리에게는 그렇게 들린다. 예부터 사람들은 가을밤 귀뚜라미 소리에 그리움이나 외로움을 투사했다.

옛 선비들은 먼 여행길에 고향의 귀뚜라미를 가지고가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고려시대 규방 여인들은 귀뚜라미를 잡아다가 머리맡에 놓고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고 한다. 나도 흉내를 내볼까 귀뚜라미를 잡아보려고 했지만 어찌나 재빠른지 좀처럼 잡을 수 가 없었다. 특히 진동에 민감해서 조금만 다가서도 울음을 뚝 그쳐버려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사진은커녕 소리를 녹음하기도 쉽지 않다.

추석 연휴기간 양재천에 저녁 산책 나갔다가 용케 왕귀뚜라미 한 마리를 붙잡았다. 다리 위 가로등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녀석이다. 잡고 보니 다리 하나가 없다. 다른 수컷과 싸우다 떨어져 나갔는지도 모른다. 이 녀석을 투명 플라스틱 통에 넣어 방구석에 놓았더니 귀뚜루루루~ 잘도 운다. 자장가 삼아 잠드는 맛이 여간 아니었다. 통에 빵과 과일 조각을 넣어주니 며칠 지나도 쌩쌩했다. 그래도 짝이 찾아올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 열심히 울게 하는 게 마음에 찔려서 며칠 후 풀섶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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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았다가 놓아주자 재빠르게 풀숲으로 돌아가는 왕귀뚜라미.

귀뚜라미는 변온동물이라 온도에 민감하지만 11월 말까지도 풀섶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기온이 떨어지면서 우는 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빈도도 뜸해진다. 눈발 날리는 날 계단 밑에서 귀릭 귀릭 하고 우는 소리는 숨이 끊겨가는 소리 같아 안타깝고 애처롭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소리마저도 그치고 풀섶은 완전 침묵에 들어간다. 그 때부터 풀섶에서는 어떤 풀벌레 소리도 나지 않는다.

이런 긴 침묵은 다음해 5월 중순 경까지 이어진다. 풀섶의 그 오랜 침묵을 처음 깨는 건 봄여름귀뚜라미다. 초여름귀뚜라미라고도 하는 이 녀석은‘뤼이익 뤼이익~’ 하고 운다. 짝짓기가 끝난 암컷은 긴 산란관을 땅속에 꽂고 알을 낳는데 알 상태로 겨울을 나고 다음해 봄 부화한다. 불완전 변태를 하기 때문에 애벌레가 아니라 약충(어린 귀뚜라미) 상태로 성장하며 6~7차례 허물을 벗은 뒤 대개 7월 말 8월 초에 완전한 성충이 된다. 이 때부터 귀뚜라미의 아름다운 연주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봄여름귀뚜라미 녀석은 5월 중순께 성충이 돼 가장 먼저 풀섶의 침묵을 깨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나뭇잎 색깔이 달라지며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풀섶이나 계단 근처에서 귀뚜라미 연주를 들을 시간도 많이 남지 않았다. 한 해가 또 저물어 간다는 뜻이다. 최근 식용으로 개발돼 미래의 유력한 단백질 공급원으로도 부상하고 있는 귀뚜라미들에게 이 가을 새삼 깊은 감사의 마음을 보내고 싶다.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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