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특파원. 특별할 특(特), 갈래 파(派), 인원 원(員)이 합쳐 만들어진 단어다. 지난 추석 연휴에는 글자 그대로 기자가 워싱턴에 특별히 파견된 보도요원, 그래서 한국은 명절이라도 이곳에서는 취재 활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명절 분위기에 들떴을 25일과 26일 프란치스코 교황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의 방미 소식을 밤낮으로 챙겨야 했다. 교황과 시 주석 일정은 예정된 것이었기에 긴장할 구석이 별로 없었다. 돌발 상황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시 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갖던 도중 존 베이너 미 하원의장의 ‘10월말 사퇴’ 소식이 돌출되며 워싱턴에서는 순식간에 ‘호떡 집에 불 난’상황이 전개됐다.

미중 정상회담과 베이너 의장 사퇴 기사를 정신 없이 처리하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자니, 워싱턴 시간으로 25일 오후 1시께(한국 26일 새벽 2시) 베이너 의장이 CNN에 등장했다. 사퇴를 결심하게 된 심정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이었다.

‘반대파에 떠밀려 나가는 형편에 무슨 변명을 하려는가’하는 마음에 싸늘한 시각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회견 내용이 기대와 달랐다. 감동적이었다. 30명에 남짓 되는 공화당 소수파에 떠밀려 나가는 게 아니라, 대의 명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걸 알게 됐다. 베이너 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책을 맡은 평범한 인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의장으로서 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제도(Institution)을 지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은 베이너 의장이 ‘공화당 1인자’자리를 내버리면서 지키려고 한 ‘제도’를 ‘폐쇄 위기의 연방정부’라고 분석했다. 공화당 급진파가 ‘연방정부 폐쇄를 통해서라도 오바마를 혼내야 한다. 베이너 의장이 반대하면 불신임 안건을 내놓겠다’고 협박하자, 결단을 내렸다는 설명이다. 당내 반란(불신임)의 불명예를 당하느니 스스로 물러나겠으나, 10월말까지는 자리를 지키며 연방정부 폐쇄를 막아내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베이너 의장의 행보로 미 의회는 최근 임시 예산집행법안을 통과시켜 연방정부 폐쇄를 모면할 수 있었다.

특별히 파견된 보도요원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베이너 의장의 말을 듣는 순간 자리를 던져 제도를 구한 그의 행보와 한국 상황이 ‘오버 랩’ 됐다. 오픈 프라이머리, 당대표 신임투표 등 그럴 듯한 명분을 내걸지만 내 것은 버리지 않고 남에게만 양보를 요구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복잡한 한국 정치권이 떠오른 건 당연했다.

‘내 임기 중에만 잘되면 그 이후는 알 바가 아니다’라는 이른바‘먹튀 경제정책’에도 생각이 미쳤다. 김대중 정부 이후 한국에서는 당장 효과는 있지만 다음 정권에는 부담되는 행태가 계속되고 있다.

내수를 반짝 살려내는 듯 했으나 다음 정부에 ‘카드 대란’을 몰고 온 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규제완화가 대표적이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진정시킨 자영업자 문제를 이명박 정부에서 고용수치 회복을 위해 뒤집은 일도 박근혜 정부에게는 부담으로 돌아왔다. 이 대통령 마지막 임기이던 2012년 10월 내수 활성화를 명목으로 소득세 원천징수 규모를 줄인 것도 이듬해 박근혜 정부 첫 경제팀에게는 일시적 세수부족의 충격파를 안겼다.

1일부터 시작된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도 같은 길을 밟을까 걱정이다. ‘검은 금요일’의 원조인 미국에서는 쇼핑 시즌 이후 소비 감소의 골이 눈에 띄게 크기 때문이다. 당장 이달에는 살아나는 것 같겠지만 총선 출마를 위해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자리를 뜬 뒤에는 소비 침체 역풍이 명약관화다.

우리나라 위정자 중에서 베이너 의장처럼 중대 결단을 내리는 인물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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