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성의 일상 속 자연 누리기 (5)

위 사진은 요즘 한창 익어 떨어지는 열매다. 이 열매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밤이게? 아니게?” 물으면 미심쩍어 하면서도 대부분 밤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유는 밤이라면 이런 질문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맞다. 이건 우리가 구워먹고 쪄 먹고, 날로도 먹는 그 밤이 아니다. 모양은 매우 비슷하지만 밤나무와는 아무런 인척관계가 없는, 옷깃도 스치지 않은 마로니에나무의 열매다.

그런데 그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불어인 마로니에의 영어 명칭은 ‘horse chestnut’이다.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말밤’. 영어권에서는 흔히 horse를 생략하고 chestnut으로 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밤의 영어명과 같다. 마로니에도 불어로 밤이라는 뜻이다. 마로니에 열매를 꼭 밤이 아니라고 말하기가 좀 거시기 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식물명에는‘너도’ ‘나도’라는 접두사가 흔하다. 어떤 식물에 비교적 가까우면 ‘너도’가 붙고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식물이면 ‘나도’가 붙는다. 식물의 차이를 꿰뚫어 이름을 붙인 조상들의 재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밤나무에도 너도밤나무와 나도밤나무가 있다.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너도밤나무는 밤나무와 다르지만 열매의 맛이 밤 비슷하고 잎 모양도 밤나무에 가까워 “그래 너 정도면 밤나무라고 할 수 있지”라고 남이 인정해 준다. 분류학상으로도 너도밤나무는 밤나무와 같이 참나무목 참나무과에 속해 친척관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나도밤나무는 열매가 밤 비슷한 것 빼고는 밤나무와 닮은 데라고는 없다. 좀처럼 남들이 밤나무로 봐주지 않는데 자신만 “나도 밤나무야”라고 억지를 부리는 꼴이다. 그래서 나도밤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무환자목 나도밤나무과여서 밤나무와는 전혀 인척관계가 없다. 마로니에는 나도밤나무과의 대표 식물이다. 요즘 마로니에나무 밑을 지나다 떨어져 밤처럼 뒹구는 열매를 보면 “나도 밤이야”라고 외치는 것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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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는 은행나무 플라타너스(양버즘) 백합목(튤립나무) 등과 함께 세계 4대 가로수로 꼽힐 만큼 가로수로 인기가 있다.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 마로니에 가로수가 특히 유명하다. 5,6월 꽃필 때와 가을 단풍 때는 장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0여 전부터 마로니에 가로수를 많이 심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곳이 교대역에서 강남고속버스 터미널로 이어지는 법원로. 양측에 마로니에 가로수가 잘 조성돼 있다. 새롭게 건설된 세종시 간선 도로변에도 마로니에 가로수가 많다.

마로니에는 큼지막한 잎이 손바닥 모양으로 3~9장이 붙어 있는데 7개인 게 가장 많다. 칠엽수라고도 하는 이유다. 우리나라 가로수 마로니에는 대부분 일본 원산이다. 통상 일본칠엽수라고 부른다. 이와 구별해 유럽 마로니에는 가시칠엽수라고 한다. 열매에 날카로운 돌기 같은 가시가 있는데, 돌기 흔적만 있는 일본칠엽수와 확연히 다르다. 일본칠엽수는 5,6월 원추형 미색 꽃이 피고, 가시칠엽수는 분홍점이 있는 꽃을 피운다. 어떤 이들은 유럽 것만 마로니에라고 하고 일본산만 칠엽수라고 구별하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림 1왼쪽이 일본칠엽수 미색꽃. 5,6월에 핀다. 오른 쪽은 가시 같은 돌기가 있는 가시칠엽수(유럽 마로니에) 열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옛 서울대 본관 앞에는 마로니에 한 그루가 거대한 수형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로니에는 일본원산인 일본칠엽수다. 서울대 전신 경성제국대학 초기인 1929년 일본인 교수가 세 그루를 심었다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있다. 이게 유럽서 건너온 건지 일본칠엽수인지 논란이 분분해 엊그제 직접 가봤다. 나무 아래에서 겉에 가시 없이 밋밋한 열매를 발견했다. 일본칠엽수가 분명하다.

그림 2마로니에 잎. 3~9장의 잎이 모여있는데 대개 7장이어서 칠엽수라고도 한다(왼쪽). 오른쪽은 일본칠엽수 열매, 표면이 가시 없이 매끈매끈하다.

낭만주의자 젊은이들이 많았던 서울 문리대 시절 이곳 캠퍼스 앞을 흐르는 개울은 세느강, 그 위에 걸친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고 불렸다. 일본칠엽수를 마로니에라도 부른 것도 식물분류학적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1970년대 가수 박건이 불러 크게 히트를 친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은 바로 이곳 마로니에 거리를 배경으로 한 노래다.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듯

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

끝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덕수궁에는 유럽 마로니에, 즉 가시칠엽수가 있다. 1912년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 환갑을 맞아 선물한 나무다. 당시 고종은 자신이 주도한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아들 순종에게 황제자리를 넘겨주고 덕수궁에서 칩거하며 울분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네덜란드 공사는 자기나라 헤이그에서 벌어진 그 사건을 기억하며 고종을 위로하려고 마로니에 묘목을 선물한 것 같다. 우람한 거목으로 자란 이 마로니에는 지금도 봄이면 싱싱한 잎과 분홍점이 박힌 원추형 꽃을 가득 피워낸다. 마치 고종의 고뇌와 망국의 슬픈 역사를 증언이라도 하는 듯하다.

마로니에 열매는 탄닌 성분이 많아 함부로 먹었다간 심한 복통을 일으킨다. 특히 아이들이밤인 줄 알고 먹었다가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이 종종 있으니 주의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먹을 수 없는 건 아니다. 도토리 우려내듯 탄닌과 독성분을 빼내고 묵이나 과자를 만든다. 일본에서는 옛부터 가루로 떡을 만들어 왔는데 전통식품으로 유명하다.

글 모두에 언급했듯이 마로니에를 영어로 흔히 chestnut으로 쓰는 바람에 번역할 때 그냥 밤이라고 써 혼란을 주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고흐의 그림 ‘활짝 핀 밤나무’가 그렇다. 그림을 보면 명백히 마로니에인데 설명은 밤나무로 돼 있다. 또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가 다락방에 숨어 지낼 때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위안을 삼던 ‘밤나무’도 마로니에다. 2012년 이 나무가 병들어 잘리게 됐다는 기사가 보도됐는데 우리 언론들은 다 밤나무로 번역했다. 우리 일상 주변의 자연에 대해 조금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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