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더하기 씀] ⑤ 공포, 언캐니, 그리고 연민

● 마네킹에 얽힌 트라우마

어렸을 때 마네킹은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다섯 살 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와 가끔 들르던 시장 옷 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 문 앞에 뽀글이 파마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마네킹이 서 있었다. 엄마가 옷을 고르는 동안 나는 가게를 들락거리며 장난질에 여념이 없었는데, 그 바람에 마네킹 팔 한 쪽이 “뚝” 떨어져나가고 말았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놀랐겠는가. 당장 엄마한테 야단을 맞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는 군데군데 살갗이 패어져 있고 손톱마다 조잡한 염료로 빨간 물을 들인 마네킹 손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몸통에서 분리된 신체 일부’ 같은 걸 어디에서 구경했겠나. 그 순간, 어린 내가 겪었던 하드고어적 공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 기괴한 사태를 가져온 원인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죄의식까지 겹쳐져서 말이다. 그 날 이후 나는 한동안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팔을 꿈속에서 계속 만나야 했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까지도, 나는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서 징그럽게 꿈틀거리거나 “툭툭” 내 몸을 두들기는 팔과 씨름하다가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지금도 마네킹만 보면 그때의 트라우마가 생각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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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소공로에 있는 신세계백화점의 쇼윈도. 명품 옷을 걸친 늘씬한 마네킹에 눈길이 간다. 이직 기자 jklee@hankookilbo.com

● 마네킹은 욕망을 반사해주는 거울

예나 지금이나, 마네킹은 옷이나 구두, 액세서리 등을 돋보이게 하는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값비싼 신상품들을 걸치고 우아한 모습으로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마네킹은 부러움이 담긴 시선을 받는다. 우리의 욕망을 반사해주는 거울 같다고나 할까. 늘씬한 팔등신 몸매,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마네킹들은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해서 지갑을 열게 만든다. 마네킹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모방 욕구를 불러 일으켜야 하고, 딱 그만큼 우리의 모습과 닮아야 한다. 유리창은 쇼윈도 안의 마네킹들과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사이를 차갑게 가로막고 있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을 하고 있는 마네킹은 그 너머에서 조용한 얼굴로 이제 막 욕망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우리의 눈을 가만히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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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시장 가게 앞 진열대에 놓여진 마네킹. 웃고있는 모습이 왠지 친숙하면서도 낯설다. 류효진 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 사람을 닮은 죄?... 팔자까지도 비슷

자본주의 속에서 모든 욕망은 자신의 기한을 가리키고 있다. 사용자들의 ‘필요’에 더 이상 맞지 않는 것들은 잠잠히 자신의 가치 하락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전에 호화로운 옷을 입고 매장의 주요 위치를 차지했던 마네킹도 유행의 흐름에 뒤처졌다 싶으면 채 낡기도 전에 용도 폐기되기 일쑤다. 어떤 것들은 바로 버려져 소각로로 가지만, 가까스로 재활용의 기회를 얻어 수명을 연장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사람을 닮은 죄일까, 마네킹은 겉모습뿐 아니라 팔자까지도 사람과 비슷한 것 같다. 새 마네킹은 백화점 명품관에서 냉담하게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고 낡은 것들은 그 뒷골목 재래시장으로 밀려나 싸구려 옷가지를 걸치고 억지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실, 마네킹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들의 모습을 포착해낸 내 마음이 그런 것이겠지. 괜스레 사람 닮은 사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쓸데없는 연민을 느끼기도 하는 나는 아직 악몽을 꾸며 식은땀을 흘리던 초등학교 어린애의 모습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게 틀림없다.

마네킹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상들을 모두 사물화, 상품화시키는 사회에서 모든 것들은 자신의 쓰임새를 갖고 태어나고, 적재적소에 맞추어 소비되고, 수명이 다하면 폐기되기 마련이다. 단지 나, 그리고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마네킹이 버려지고 잘리고 태워지는 꼴이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차라리 마네킹을 보며 순수한 공포를 느끼던 어린 시절의 시선이 그립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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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트럭 짐칸 위에 놓인 마네킹의 두 발이 섬뜩하다. 멀티미디어부 박서강 차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인데, 당시 제목은 '백주대낮에 일어난 토막운반사건!'이었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 친숙한 낯설음, 그 ‘언캐니’에 대하여

만일 고속도로에서 거꾸로 뒤집혀진 마네킹의 두 발을 목격한다면 당장에 “헉!!” 소리를 내지르며 오금이 저릴만한 광경이다.(아니, 내가 유독 심장이 약한 건가.) 아마도 이 트럭의 운전자는 일부러 저런 기괴한 모습을 연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절단된 ‘부분대상’로서의 신체는 우리에게 ‘언캐니(uncanny)’란 용어를 떠올리게 한다. ‘언캐니’란 낯설음과 친숙함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아주 가끔 죽음과 삶, 삶과 죽음이 동시에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살아있는 줄 알았던 것이 기실 죽은 것이었고, 죽은 것인 줄 알았던 대상이 갑자기 살아있는 것으로 보일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인지 원초적인 공포나 놀라움을 자아내는 신화, 공포물, 그리고 SF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인형, 조각상, 안드로이드 등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선 심지어 신들 조차 인간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이렇게 추상적 관념이나 신적 대상을 인간화시켜 생각하는 방식을 신인동형설(anthropomorphism)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인간과 유사-인간들 사이에 놓여 있는 차이를 교란시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유사-인간들, 인간임을 자처하지만 오히려 인간답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폭로함으로써 이러한 이야기들은 인간인 ‘나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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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충돌실험을 앞두고 있는 더미 가족.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기구한 운명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류효진 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 더미를 통해 ‘위험사회’를 읽다

나로 하여금 섬뜩함과 더불어 애절한 안쓰러움을 느끼게 한 사진이 여기 있다.(이 사진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사인(四人) 가족으로 보이는 이 마네킹들은 자동차 충돌시험에 주로 쓰이는 ‘더미(dummy)’들이다. 사진에 드리워진 어두운 색조, 우수에 젖은 짙은 그림자, 이 때문에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어두운 표정 등은 분명 의도된 것이다. 이들은 곧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예정이다. 마네킹의 형제 뻘인 ‘더미’는 내부 근육과 장기 등 신체의 모든 부분이 데이터로 만들어져 물리적 충돌 때 인간이 입을 부상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모형 인간이다. 어린이, 아기, 임산부, 노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처한 모든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갖가지 더미가 만들어지지만 공통적인 것은 이들에게 어떠한 자비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수리와 재활용을 거듭하면서 수백 차례의 자동차 사고를 겪어내야 한다. 인간의 대체재이자 짝퉁으로 사는 더미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은 이처럼 고되다.

이 사진은 온갖 재난과 자연재해, 그리고 가족을 해체시키는 사회 경제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우리 ‘인간 가족’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자화상과도 같다.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이들의 무덤덤한 얼굴에 자신들의 배우자, 아들, 딸의 얼굴을 겹쳐보라.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광경 때문에 몸을 떨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더미 가족은 언제 어디서든 우리에게 닥쳐올지도 모르는 온갖 위기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이들에게 닥쳐올 비참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늘을 등지고 힘없이 앉아 있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 나 자신에게도 닥쳐오게 될 아픔을 암시하고 있다. 이 사진 한 장은 내가 어렸을 때 마네킹에게서 느꼈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다섯 살 때 내가 느꼈던 공포는 이젠 어른이 된 내게 더욱더 실제적인 감정인 안쓰러움, 즉 ‘연민’으로 번역된다. 마네킹에게서 안쓰러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성숙함에 이르렀다는 걸 뜻할까, 아니면 자신의 왜소함과 무기력을 사물에 투영할 정도로 범상한 일상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걸까. 나는 둘 다라고 생각한다. 단지 더 이상 몸에 들러 붙어있는 잘린 팔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 것처럼, ‘위험사회’ 한 복판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걷힐 날이 오리라 믿을 뿐이다. 그런 믿음으로 또 하루를 건너가는 내가 안쓰럽다.

이직 기자 jk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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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1월28일자 view &면. 더미의 일생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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