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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칼럼] 침묵 속의 절규, ‘나는 인간이다’

입력
2015.09.0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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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진이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9월 2일 부모와 함께 시리아를 탈출하다가 배가 뒤집혀서 변을 당한 후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3살의 소년, 아일란 쿠르디의 시신이 담긴 사진이다. 역사적 사건이 되고 있는 이 사진의 작가 닐류페르 데미르는 해변가에서 아일란의 주검을 보면서, 사진을 통해서라도 그의 “소리없는 비명”을 표현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세계 곳곳의 분쟁들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사진들에는 별 반응을 하지 않던 이들도,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3살 사람’의 처절한 주검 앞에서 할 말을 찾지 못한다. 국가적 경계를 넘어선 이러한 감정 이입을, 울리히 벡은 ‘우주적 (cosmopolitan) 감정 이입’으로 명명한다. 정치적 분쟁 너머에 존재하는 이 ‘3살 사람’이, 차갑고 싸늘한 주검으로 우리를 대면한다. 그런데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우주적 감정 이입’을 하고 있는 그 ‘3살 사람’은 우리에게 누구이며, 그의 ‘침묵 속의 절규’는 무엇인가.

‘3살 사람’의 주검 앞에서 국적과 상관없이 수많은 이들이 느꼈던 그 순전한 ‘우주적 감정 이입’은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세네카에 따르면, 인간은 두 종류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 국적이나 출생지에 따라서 결정되는 ‘지역 공동체’와 모든 인간이 속한 보편적 ‘인류 공동체’이다. 하나의 태양 아래 함께 살아가는 운명을 지닌 이 ‘인류 공동체’야 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세계화 이후 ‘세계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또는 ‘작은 세상’이라는 표현은 곳곳에서 회자된다. 이러한 표현은 기후, 경제, 정치, 문화, 질병을 포함하여 이 세계 어느 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전지구적 상호연관성’의 현실을 예시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현실은 이제 우리 주변의 다양한 타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타자에 대한 배려와 책임이 한 국가적 경계 안에만 제한되었던 사유방식을 벗어나서, ‘인류 공동체’라는 범주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적 경계를 넘어선 ‘인류 공동체’에 대한 책임성에 대한 인식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하여 실천되어 오고 있다. 1971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국경 없는 의사회’ 와 같은 단체는 인종, 국적, 종교 등을 넘어서서 전쟁, 기아, 자연적 재난 등에 의한 희생자들을 돌봄으로써 그들을 ‘동료 인간’으로 대하며 환대를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간주되곤 하는 국경, 민족, 인종, 종교 등의 경계선들이란, 사실상 근원적인 경계들이 아닌 것이다.

같은 민족인 북한과도 이러한 ‘인류 공동체’라는 가치를 적용시키지 못하고 살아 온 한국인들에게, ‘동료 인간’의 범주를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 확장하여 개인적 또는 제도적 환대를 나누는 ‘코즈모폴리턴 환대’의 의미는 참으로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인류 공동체’로서 실천하는 ‘코즈모폴리턴 환대’를 사회정치적 현실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은 참으로 먼 길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가능한 꿈’을 꾸어 온 사람들에 의하여, 인류의 역사는 변화를 거듭해 왔다.

나치 시대에 지독한 외국인 혐오사상을 정치화했던 독일이, 모든 난민들을 수용하겠다는 것은 우연이나 정치적 계산 때문만이 아니다. 독일 땅에 도착하는 모든 난민들을 ‘동료 인간’으로 대하고 삶의 조건들을 제도적으로 마련해 주고자 하는 것은, ‘외국인 혐오’가 낳은 역사적 비극에 대한 치열한 비판적 반성 후에 나온 ‘코즈모폴리턴 환대’의 정치사회적 실현이기도 하다. ‘가까운 타자(가족, 친척, 친구, 동료, 내국인 등)’ 만이 아니라 ‘먼 타자(이주민, 난민, 외국인 등)’들도 ‘인류 공동체’에 속한 우리의 ‘동료 인간’이다. 대체불가능한 존재로서의 ‘3살 사람 아일란’은 ‘먼 타자’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아프게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다.” 시리아 국경을 탈출하여 다른 나라로 가는 난민들을 폭력적으로 막고 있는 경찰들에게 난민들이 외친 구호이다. ‘3살 사람 아일란’들은 처절한 침묵 속의 절규로 이 엄중한 선언을 한다:‘나는 인간이다.’ 지금도 한국사회에는 ‘나는 인간이다’를 선언하고 있는 ‘3살 사람 아일란’들이 있다. 난민들을 포함한 미등록 이주민과 그들의 자녀들, 또는 극도의 빈곤과 사회정치적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생존권, 보호권, 발달권, 참여권 등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 이들 모두는 바로 우리가 ‘우주적 감정이입’을 작동시켜야 하는 ‘3살 사람 아일란’들이다.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악마적인 것이란 비책임성이다.” 국가라는 ‘지역 공동체’만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에 속한 존재로서, 우리가 ‘가까운 타자’만이 아니라 국적이나 신분이 다른 ‘먼 타자’들에게까지 환대를 베풀고 연대를 모색하는 정치를 지지하고 선택하는 것은 ‘동료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책임이다. 또한 ‘악마적인 것’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3살 사람 아일란’ 들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코즈모폴리턴 환대의 원’을 조금씩이라도 확장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성에 대하여 침묵 속의 절규로 상기시킨다. 세네카가 강조하는 바, 우리 모두는 ‘태양에 의한 시민권’과 ‘출생에 의한 시민권’이라는 ‘이중 시민권’을 지닌 이들이다. 한국사회에서 인종, 국적, 신분 등 다양한 이유로 처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향해서 사회정치적인 ‘환대의 지평’을 확대해야 하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닌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며 ‘인류공동체’의 절박한 시대적 요청이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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