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동해 문명사'

국민국가 중심 역사 시각서 벗어나

여진·아이누·알류트 등 소수민족의 베링해까지 걸친 해양교류사 복원

환동해 문명사 주강현 지음 돌베개 발행ㆍ730쪽ㆍ4만원

한국과 일본이 동해냐, 일본해냐 표기를 두고 다투는 바다, 동해. 한국인에게 동해는 두만강 하구부터 경상도 남쪽까지다. 그러나 좀더 멀리 눈을 돌려 환동해, 다시 말해 동해를 에워싼 해역으로 범위를 넓히면 러시아 연해주와 사할린, 일본 북방 홋카이도가 들어온다. 사할린에서 더 가면 쿠릴 열도와 캄차카 반도, 베링해를 지나 북미대륙 서쪽 끝 알류산 열도까지 이어진다.

해양문명사를 연구해온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가 쓴 ‘환동해문명사’는 한국과 일본 사이 좁은 바다, 동해가 아니라 동해부터 오호츠크해와 베링해까지 환동해권 전체를 무대로 바닷길을 통한 문명 교류의 역사를 다룬다. 730쪽에 이르는 이 두툼한 책은 20여년에 걸쳐 현지를 답사하고 자료를 모으며 연구한 결실이다. 환동해권의 동아시아 교섭사를 다룬 책으로는 최초일 것이다. 한국 학계는 해양문명사 연구 자체가 일천해 환동해 연구는 더욱 드물다.

저자는 환동해를 ‘문명의 회랑’이라고 말한다. 여러 나라와 종족들로 둥글게 에워싸인 거대한 호수 같은 바다라는 점에서 회랑이고, 이를 통해 남한과 북한, 일본, 러시아, 중국, 몽골 등 동북아 모든 나라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접촉하고 부딪히고 융합하며 문화를 교류를 했다는 점에서 문명의 회랑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국민국가 중심의 서술을 버렸다는 점이다. 한국, 일본, 러시아, 중국의 역사만 가지고 환동해를 서술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환동해를 역동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온 ‘작고 국가 없는 사회의 기록 없는 역사’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두만강 하구의 여진족, 시베리아 동부의 사하족, 아무르 강과 우수리강 유역의 나나이, 울치, 니브흐, 우데게, 홋카이도와 사할린의 아이누족, 캄차카의 이텔멘, 알류산 열도의 알류트족 등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환동해권의 또 다른 주체로 불러내 그들의 지워진 역사를 복원한다.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를 배경으로 벌어진 국가 간 전쟁과 갈등 같은 굵직한 역사는 책의 일부일 뿐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동해니 일본해니 하는 명칭은 모두 아전인수격 해석이다. 그보다는 동일 해역권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총합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어민과 소수민족 아이누의 조우. 아이누가 잡은 물고기를 교역하고 있다. 고다마 데이신 그림. 돌베개 제공

저자는 수천년 전부터 환동해 네트워크가 존재해 왔다고 강조한다. 여러 나라와 종족이 바다를 건너거나 연안을 따라 환동해를 오감에 따라 고대 이래 다양한 길이 열렸고, 그 길을 따라 꾸준히 교류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한반도에 자주 상륙했던 왜구의 길 말고도 연해주에서 사할린으로, 사할린에서 홋카이도로, 홋카이도에서 일본 열도로 순환하는 루트가 있었다. 국민국가의 국경을 넘어 시야를 확장하면, 한반도의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아무르강 하구와 연해주의 시호테알린 산맥까지 이어진다. 한반도 북부 함경도에서 남으로 경북까지 퍼진 음식인 식해는, 시호테알린 산맥 동쪽 바다를 남북으로 오가며 가자미와 명태 등을 잡아 식해를 만들어 먹었던 옥저와 동예, 발해의 유산이다.

‘식해의 길’뿐 아니라 다양한 문명의 바닷길이 환동해권에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발해의 일본 직통 루트다. 두만강 하구에서 동해를 사선으로 가로질러 곧장 일본에 당도하는 이 길로 발해의 사신과 무역이 왕래했다. 20세기 들어 일제가 만주를 침략할 때 이용한 길이기도 하다. 이밖에 모피를 구하기 위해 시베리아를 횡단해 알래스카까지 이른 ‘담비의 길’, 중앙아시아에서 멀리 발해까지 와서 거주지를 꾸렸던 ‘소그드 상인의 길’, 함경도 북부-캄차카 반도-일본 나가사키-중국을 연결해 해삼을 교역하던 ‘해삼의 길’, 다시마가 홋카이도에서 혼슈를 거쳐 중국으로 넘어가던 ‘곤포의 길’, 아무르강 하구-홋카이도-혼슈를 잇는 ‘에조면(면직물)의 길’, 에도시대 일본의 주요 항구를 망라한 무역 네트워크로 번영을 구가했던 ‘기타마에부네의 길’ 등이 있다.

소수민족의 환동해 경략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1019년 여진족의 일본 침입 사건이 있다. 두만강 하구의 여진족이 고려 연안을 휩쓴 뒤 동해를 가로질러 울릉도를 치고 규수까지 들이쳤다. 규수에서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당시 평균 15m에 달하는 대형 선박 30~40여척에 나눠 탄 3,000여명의 여진족 선단이 움직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세기 일본 막부가 쇄국정책을 유지하면서도 북방 교역은 지속할 당시, 혼슈 이남과 중국의 동쪽 끝 연해주 사이의 교역을 중계한 것은 일본 북단 아이누족이었다.

유럽에서 볼 때 환동해는 극동에 위치한 변방의 바다에 불과하지만, 이 곳에서 삶을 꾸려온 이들에게는 변방이 아닌 중심이고 환동해의 주체는 국민국가뿐 아니라 소수민족도 포함된다. 이렇게 보면 변방과 중심의 이분법은 힘을 잃고 만다. 환동해권의 여러 주체를 중화와 오랑캐, 문명과 야만, 기록된 역사와 기록되지 않은 역사 식으로 갈라 차별하는 시각으로는 환동해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동해와 일본해를 넘어 환동해를 봐야 하는 이유는 미래와 연결된다. 서문에서 저자는 “한반도의 좁은 울타리, 더군다나 남한이라는 ‘섬’ 논리에 갇힌 상태에서 벗어나 유라시아로, 환동해와 오호츠크해로 나아가는 인식 전환은 국가 어젠다인 동북아 중심 사고나 북방정책의 누락 부분인 ‘해양 진출’이라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환동해를 하나의 문명권으로 묶을 수 있느냐는 학술적 쟁점이겠으나, 시야를 확장하라는 이 책의 제안은 그 자체로 신선하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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