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을 걷다(4) 서대문독립공원

무더위가 한풀 꺾인 8월 말 오후의 독립문 앞에는 동네 꼬마들의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독립문을 중심으로 앞뒤 좌우에 제법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어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즐겁게 놀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문을 비롯해 인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과 3ㆍ1운동기념탑 등을 묶어 서대문독립공원이라고 부른다. 서대문독립공원의 여러 시설은 그 이름만으로도 민족독립의 상징적 공간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삼일절이나 광복절을 전후해 한번쯤 들러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게 한다.

●친일인사 주도로 건설된 독립문

서대문독립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독립문이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1897년 완성한 독립문은 높이가 14m를 넘는 거대한 화강암 문이다.

독립문은 파리의 개선문을 흉내내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독립문이 위치나 건립 주도 세력의 성격 등으로 볼 때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표방한 것이라고 말한다.

독립문 자리에는 원래 다른 문이 있었다. 은혜를 입는다는 뜻의 영은문(迎恩門). 중국 황제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조선 중종 때 세웠다. 문 뒤에는 중국 사신을 맞는 모화관(慕華館)이 있었다. 조선 말에 촬영된 흑백사진을 보면 영은문은 유난히 긴 초석과 원기둥, 그리고 그 위의 키 작은 지붕으로 구성돼 있다.

영은문을 중국에 대한 사대라고 주장하면서 독립문으로 대체하자고 요구한 대표 인사가 서재필이다.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1895년 조선으로 귀국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당시 협회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바로 독립문 건립이다. 독립협회에는 훗날 친일 행위를 한 인사가 많이 참여했는데 특히 이완용은 창립총회 위원장과 2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독립문에도 흔적을 남겼다. 작가 윤덕한은 1999년 쓴 ‘이완용 평전’에서 독립문 꼭대기의 현판이 이완용이 쓴 것이 분명해 보인다고 주장했다. 전문가 모두가 동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독립문 꼭대기에 있는 현판. 작가 윤덕한은 이 글씨를 친일파 이완용이 썼다고 주장했다.

독립이라는 말만 들어도 펄쩍 뛸 조선총독부는 나중에 큰 돈을 들여 이 문을 보수하고 고적으로 지정해 보호까지 했다.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여기는 독립문이 친일 세력의 주도로 건립되고 매국노 이완용의 흔적을 품고 있으며 일제의 보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그때의 독립이 무엇을 표방했는지, 독립문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같은 사실과 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독립문 부근에서는 광복절 행사와 일본의 역사왜국 등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따금 열리기도 한다.

독립문 바로 뒤 서재필 동상 역시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일찍이 개화운동에 뛰어든 서재필은 훗날 임시정부 구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재산을 내놓는 등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를 둘러싼 논란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먼저 그가 주도한 독립신문이 친일 논설을 실었다는 지적이 많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로는 조선인이 아니라 미국인으로 살았다.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조선말을 잊었다며 영어로만 이야기하고 미국식 생활습관을 따르자고 주장했다. 해방 후 일부에서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며 미국국적 포기를 요구하자 그는 이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독립문 뒤에 세워진 서재필 동상. 갑신정변에 실패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귀국 후 독립문 건립을 주도했다.

●고문의 실상 보여주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재필 동상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나온다. 1908년 문을 연 경성감옥이 서대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바뀌었는데 서울구치소가 1987년 경기 의왕으로 옮기자 그 자리와 시설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꾸몄다. 경성감옥이 처음 문을 열 때의 사진을 보면 산 기슭에 옥사만 을씨년스럽게 서있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학교, 시가지와 연결돼 있고 찻길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도 요란하다. 인근 영천 시장은 출소자에게 먹일 두부를 산 곳이고 길 건너 여관촌에는 수감자를 면회하려는 사람들이 머물렀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정문. 담장과 망루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망루 옆 입구로 들어가면 전시관이 나온다. 이곳에는 허위, 이강년 등 조선말 의병 지도자와 한용운, 류관순, 김구, 강우규, 안창호, 여운형 등 독립운동가가 수감됐는데 전시관에는 항일운동의 역사가 잘 정리돼 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곳은 고문실이다. 구타나 물고문은 물론 꼬챙이로 손톱 밑 찌르기, 송곳을 설치한 나무 상자에 넣어 굴리기 등 일제가 가한 고문의 실상을 보여준다. 관람객은 이 중 벽관에 들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벽에 세운 좁은 관에 사람을 넣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해 전신마비를 부르는 고문이다. 때마침 한 남학생이 재미 삼아 들어갔다가 몇 초 만에 뛰쳐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으니 너무 답답해. 그 때문에 숨쉬기마저 곤란하고 더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전시해놓은 벽관. 이 안에 들어가면 꼼짝달싹할 수 없어 몸과 마음이 답답해지고 전신마비 증상이 온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벽관에 가둬 고문했다. /2015-08-31(한국일보)

고문을 일본 경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노덕술이나 하판락 같은 조선인 형사가 더 지독했다. 친일 경찰의 대명사인 노덕술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은 물론 사람을 상자에 넣어 못을 박거나, 혀를 뽑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고문을 했다. 영화 ‘암살’에 등장하는 의열단 의백 김원봉도 해방 후 서울에서 노덕술에게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김원봉은 조국이 독립을 했는데도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수모를 겪고 결국 북으로 넘어갔다. 울산시는 이런 노덕술을 지난해에 ‘울산의 인물’로 선정하려다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판락은 사상운동조직 사건으로 체포한 이미경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자 그의 혈관에 주사기를 꽂고 피를 뽑아 뿌리는 짐승만도 못한 짓을 했다. 이들의 고문은 해방 이후 근절되지 않고 정보기관이나 경찰 등에 계승돼 민주 인사를 탄압할 때 사용됐다. 그래서 박종철이 목숨을 잃고 김근태가 사경을 헤맸으며 이을호가 정신병을 얻고 서승이 난로를 향해 몸을 던졌다.

옥사로 가면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특히 11옥사의 감방에는 리영희 교수, 이소선 여사, 이돈명 변호사 등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 등으로 고초를 겪은 인사들에 대한 자료와 이들의 발을 본뜬 족적이 전시돼 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나 한승헌 변호사 등 생존 인물의 기록도 보인다. 전시관이 항일운동 중심으로 꾸며진 것에 비해 이곳 옥사는 민주화 기록을 일부나마 담고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관계자는 “지금은 항일운동을 주로 소개하고 있지만 추후 민주화 운동에 관한 소개도 비중을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한 방에 리영희 교수와 관련한 자료를 모아놓았다.

마당으로 나와 서쪽으로 걸어가면 사형장이 나온다. 사형수가 의자에 앉으면 마루와 의자를 함께 밑으로 꺼지게 하는 방법으로 교수형을 집행했다. 1923년 사형장을 만들 때 미루나무 두 그루를 심었는데 죽은 자의 원혼 때문인지 사형장 안 나무가 바깥 나무보다 훨씬 왜소하다. 이곳에서는 허위, 강우규 같은 항일운동가뿐 아니라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과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도예종 등 인혁당 사건 관계자의 사형이 집행됐다. 관람객들도 그들의 죽음에 숙연해진 듯 사형장 부근에서는 말을 아낀다.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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