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통치되고 북한은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통치된다. 지난 주 타결된 남북 고위급 회담은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이 CCTV를 통해 실시간으로 그 내용을 실시간으로 듣고 보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번 회담 합의문의 제2항은 이렇다.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유감을 표명했다’는 말은 주요 외신에 의해서 ‘North Korea expressed regret’라고 번역되었다.

북한의 유감 표명은 2002년 서해교전 이후에도 있었다. 그 당시 보수 언론들은 북한의 유감 표명에 대해 그것은 사과라고 볼 수 없다고 강력하게 항의하는 칼럼들을 실었다. 그 때 대통령은 김대중. 이번의 유감 표명에 대해 보수 언론들은 어정쩡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유감스럽겠지만 유감을 표명하지는 않고 있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오른쪽)과 북측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지난달 25일 판문점에서 '무박4일' 마라톤 협상을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유감’에서 유(遺)란 한자어는 고대로부터 ‘잃다, 버리다, 남기다’ 등의 뜻을 가진다. 이 뜻은 오늘날 각기 ‘유실물, 유기견, 유산’ 등의 낱말에 들어가 있다. 감(憾)은 섭섭함, 서운함, 근심, 원망, 원한 등의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미 마음 심 자가 들어가 있는 느낄 감(感)에 마음을 뜻하는 심방변이 다시 추가된 글자다.

중국 고대 문헌에서 유감이라는 단어의 전거를 찾아보면, 두보의 시가 나온다. 어느 벼슬아치에게 준 시에서 두보는 그의 시 솜씨를 칭찬하고 있다. 여기에 “호발무유감, 파란독노성(毫髮無遺憾, 波瀾獨老成)”이란 구절이 있는데, 의역하면 “조금도 미흡함이나 아쉬움이 없고, 문장의 기복이 홀로 힘 있고 노련하다”가 된다.

영어 ‘regret’은 “과거에 했던, 혹은 하지 못했던 어떤 것으로 인해서 마음에 생기는 아픔이나 괴로움”을 가리키는 뜻으로 16세기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 보통 ‘regret’는 말하는 이가 어떤 일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그러니까 애석하게 또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듣는 이에게 정중하게 나타낼 때 쓰인다.

냉정하게 보자면 ‘regret’든 ‘유감’이든 간에, 그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 네거티브한 느낌이 화자에게 있다는 것을 표현할 따름이다. 과거에 나쁜 일이 있었지만 그게 화자의 책임이라는 것을 명시하지 않고서도 말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정치 및 외교는 본디 말의 기예에 속하므로, 말을 노골적으로 혹은 거칠게 쓰는 것을 기피한다. 노코멘트에서부터,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음), non-denial denial(부인 아닌 부인), non-apology apology(사과 아닌 사과) 등 여러 단계와 종류의 발화 테크닉이 정치-외교 분야에서 쓰인다.

남한에서의 핵무기 존재에 관해서 미국이 전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게 NCND고, “나는 르윈스키씨와 성 관계를 갖지는 않았다”는 빌 클린턴의 말이 ‘non-denial denial’이며, 지난 번 광복절 때 일본 아베가 했던 것과 이번 합의문에서 북한측이 한 것이 ‘non-apology apology’에 속한다. 사과 아닌 사과를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레토릭이 필요하다.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때 사용했던 ‘통석의 염’이 바로 그러한 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유감’이라는 말을 썼으므로, 과거에 대해 얼버무리면서도 좀 더 애석하다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일본의 관리들이 상당히 고심해가며 찾아낸 말일 것이다.

이번 북한의 유감 표명에 대해 박근혜정부는 이것을 성과로 자평하는 분위기다. 뒤집어 보면, 김정은 위원장도 남한의 확성기 방송 중단을 성과로서 체제 안에서 선전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나는 평소에 남북한 체제 모두를 비판적으로 보는 정치적 입장이었지만 이번 회담 성과는 ‘통 크게’ 좋게 받아들이고 싶다.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 니 거인 듯 니 거 아닌 니 거 같은 나~” 남북한은 이제 막 정치적으로 ‘썸’을 타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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