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뉴질랜드 청년 제네바 비싼 물가에

"6개월간 생활비 등 1만~2만달러 감당 못하는 사람들엔 명백한 차별"

동료 인턴들 일일 파업 벌이고 반기문 총장에 문제해결 촉구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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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유럽본부에서 무급 인턴으로 일한 뉴질랜드 청년 데이비드 하이드가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에서 노숙 생활을 하고 있는 파란색 텐트 앞에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유엔 신분증을 목에 걸고 서 있다. 제네바 트리뷴 트위터.

전세계 청년들이 여름 인턴십에 돌입하는 8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국제기구 유엔의 한 청년 인턴 사진으로 떠들썩했다. 넥타이는 메지 않았지만 단정한 셔츠에 검정색 정장을 입고 반짝이는 정장 구두와 한 쪽으로 잘 넘긴 머리, 목에 걸린 유엔 배지까지. 누가 봐도 유엔 인턴십이라는 최고의 기회를 잡은 행운아처럼 보이지만 그의 뒤에는 한 사람이 눕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파란색 1인용 텐트, 둘둘 말린 매트리스와 잡다한 캠핑 도구가 수풀 더미 속에 널려있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하이드. 이 22세 뉴질랜드 청년은 유엔 유럽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의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머물 방을 구하지 못하고 제네바 호숫가에서 텐트를 치고 일주일 넘게 노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텐트에서 생활하는 유엔 인턴 사연 일파만파

지난달 10일 제네바 현지 언론인 ‘트리뷴 드 제네바’에 처음 보도된 그의 사연은 딱하기 짝이 없었다. 뉴질랜드에서 국제관계대학원을 졸업하고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었던 하이드는 유엔의 6개월짜리 인턴십에 지원해 합격했다. 둘도 없는 기회를 잡았다는 기쁨도 잠시, 당장 제네바에서 6개월 동안 머물 방을 알아봤지만 임대료가 그의 형편에는 턱없이 비쌌다. 하지만 유엔은 이 인턴과정에‘급여 없음ㆍ교통편 지원 없음ㆍ주택 및 의료 지원 없음’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에 있는 가족들은 그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내가 유엔 인턴십에 합격했을 때, 가족들은 모두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유엔에서의 인턴십은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결국 그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호숫가에 텐트를 치는 노숙생활. 트리뷴 드 제네바에는 비가 오면 방수가 되지 않는 텐트로 빗물이 새 들어와 소지품을 적시고 매일 구두에 진흙이 뭍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오전 9시까지 제네바 호수 근처에 있는 유엔으로 출근하는 하이드의 고달픈 생활을 전했다.

‘텐트 치고 노숙하는 유엔 무급 인턴’소식의 파장은 엄청났다. 하이드에게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이 빗발쳤다. 더 나아가 그 동안 전세계의 인권 증진과 불평등 해소를 목표로 하는 국제기구가 정작 조직 내에서 노동력을 무료로 착취하는 행태를 비판해온 국제기구 내 인턴 조직들도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달 14일 제네바의 유엔 인턴들은 하이드를 지지하며 일일 파업을 벌였다.

같은 날 이들은 직접 유엔 수장인 반기문 사무총장에게 무급 인턴 문제해결을 호소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올 3월 조직된 미국 뉴욕 본부의 유엔 인턴과 젊은 직원들의 모임인 ‘공정하게 보상받는 양질의 인턴십 계획’(Quality and Fairly Remunerated Internships Initiative - QFRII)과 제네바의 유엔 인턴 모임인 ‘인턴에게 급여를 지불하라 이니셔티브’(Pay Your Interns initiative)가 공동으로 초안을 작성하고 전세계 20개 국제기구, 학교, 기업들의 인턴들과 학생단체가 지지를 표명한 공개서한에서 이들은 “인턴은 경험뿐만 아니라 재정적, 비재정적으로 필요한 지원을 받아야 한다”며 유급 전환을 촉구했다.

이들은 서한에서 유엔의 근본정신을 내세웠다. ‘유엔은 주요기관이나 보조기관에 참가하려는 남녀에게 어떠한 제한을 둬서는 안된다’는 유엔헌장과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똑같은 일에 똑같은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세계인권선언 23조를 근거를 들었다. 이들은 “무급인턴제는 재정 지원 없이 일할 수 없는 유능한 청년들에게 간접적인 제한을 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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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인 지난 5월1일 국제 기구들이 모여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 각국의 인턴들이 “정당한 급여를 지급하라”며 무급 인턴십에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swissinfo.ch.

‘유엔 무급인턴직, 제3세계 인재 차별’비판

이들은 뉴욕과 제네바가 세계적으로도 물가가 비싼 도시라는 점에서 무급 제도는 제3세계 인턴들의 국제사회 진출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2009년 통계에 따르면 유엔 인턴의 40%가 개발도상국 출신이지만 오직 5%만이 최빈국 출신이었다. 2007년 유엔 인턴 중 67%가 선진국 출신이었다. 이안 리차드 유엔 제네바 직원 협의회 사무총장은 “현재 제네바의 유엔기구 인턴 162명 중 2명만이 개발도상국 출신”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무급은 불공평하다’ 캠페인 그룹을 이끄는 매튜 해밀턴은 “6개월간 유엔 무급 인턴십을 수행하는 동안 생활비 등으로 1만~2만달러는 들어가는데, 이 비용을 인턴들이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터무니없다”며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는 명백한 차별행위”라고 말했다.

이들의 공개 서한에 대한 반 총장의 공식 응답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다만 반 총장은 18일 유엔 사무국 인턴들과의 사진촬영 시간에 인턴의 ‘경제적인 상황’에 대해 사과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 총장의 발언에 대해 QFRII 대표 디미트리 바르베라는 “매우 불만족스러웠다”며 “각국의 유엔 대표부를 접촉해 인턴 문제를 9월 유엔 총회에서 의제로 올릴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고 언론에 밝혔다.

유엔도 무급인턴정책의 폐단을 인정하고 인턴십 정책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스테판 두자릭 반 사무총장 대변인은 현재의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유엔은 무급인턴직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인턴직을 허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인턴 무급 정책 변화에 대해서도 “내부에서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며 “회원국 및 총회, 예산과 그의 사용과 관련이 있다”며 예산 문제를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함을 내비쳤다.

한편 지난달 20일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유엔이 인턴에게 급여를 지급한다면 예산상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1996년 131명이었던 인턴 수가 지난해 4,018명으로 불어났는데, 이는 유엔이 더 이상 새로운 직원을 채용할 예산이 없자 2개월에서 6개월까지 인턴십이라는 이름으로 무급 근무를 할 의향이 있는 대졸자에게 눈을 돌린 상황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유엔 인턴들이 시위를 벌인다고 해도, 유엔 인턴십이 가져올 인맥과 경험, 이력서에 남는 ‘스펙’등의 무형의 가치를 구직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급 인턴의 지원자는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급 인턴 전환의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예산이다. 인턴 4,000여명에게 급여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1년에 150억원 이상이 소요되는데, 유엔은 예산 삭감으로 기존 직원마저 해고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인턴 채용은 정직원 채용만큼 절차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유급 인턴 제도는 학연, 지연에 따른 불공평한 채용과정의 경쟁률만 더 높여 제3세계 국가 출신들에게 여전히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도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똑똑한 후보가 뉴욕이나 제네바의 물가를 감당할 수 없어 유엔을 버리고 유급 인턴십을 제공하는 다른 조직으로 가는 경우도 왕왕 벌어진다”며 유엔이 무급 인턴십을 고집하는 한 유엔 정신에 걸맞는 인재들을 놓치게 될 것임을 지적했다.

'열정 페이' 꼬집은 방송인 유병재 SNS 캡처

하이드 “텐트 생활은 무급 인턴직 실상 알리려 계획”

한편 이 같은 무급인턴 논란을 처음으로 촉발시킨 하이드는 지난달 12일 돌연 유엔 인턴직을 그만두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제네바 유엔 건물 앞에서 부스스한 머리에 구겨진 셔츠 차림으로 약 2주간 유지했던 자신의 인턴직 ‘사임’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 상황에서 인턴으로서의 내 역할을 지속해나가는데 집중하기 힘들다”라며 이유를 밝혔다. 또한 그는 유엔 인턴십 면접 자리에서 무급 인턴십 기간 동안 온전히 자신을 부양할 수 있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이어 지난달 14일 하이드는 온라인 매체 ‘더 인터셉트’에 게재한 글에서 자신이 처음부터 무급인턴십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텐트 생활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국제 기구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싶었기에 인턴십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무급 인턴십은 불평등을 지속시키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대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유엔 인턴십에서 무료로 일하겠다”는 약속이 담긴 지원서를 쓰면서 좌절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역시 구직자인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털어놓은 뒤, 둘이 함께 무엇을 시도해 볼 것인가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결과 일단 유엔 무급 인턴십으로 일하되 무급 인턴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자는 계획을 세우게 됐다는 것이다.

인턴십에 합격한 그는 제네바의 높은 임대료 때문에 집을 구할 수 없게 돼 결국 텐트생활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유엔 인턴이 텐트에서 산다는 사실이 세간의 이목을 끄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일주일을 산 뒤 그는 주목을 끌기 위해 언론에 자신의 상황을 흘렸고 보도와 이슈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큰 반응에 놀랐으며, 의도한 것보다 상황이 커져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일각에서 그를 두고 ‘거짓말쟁이’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 비판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며 “일부는 나를 극단주의자처럼 보이게 해 망신을 주려 하겠지만, 인턴의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내 희망에는 어떠한 극단적인 요소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 나는 더 이상 인턴이 아니지만 인턴의 권리는 확실히 주목을 받았다”며 “내가 한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여부는 오직 현재 인턴십 시스템 아래서 고통 받는 젊은이들만이 대답할 자격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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