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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입력
2015.08.3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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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있고, 가출이 있다. 한 동굴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 없듯이, 호시탐탐 집안의 왕좌를 넘보던 아들이 아버지를 꺾어보겠다고 작심한 것이 집을 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아들의 극복 모델이면서 아들의 입사(入社) 의식을 이끌어 줄 아버지가 금지 권력을 잃어 버렸거나 무색무취하게 존재할 때, 더 이상 오이디푸스적 단련(鍛鍊ㆍ training)은 생겨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줄 알았던 아버지가 알고 보니, 진급과 퇴출 앞에 쪼든 나약한 ‘회사 인간’일 줄이야? 이처럼 자본주의가 아버지의 권위를 몽땅 빼앗아간 상황에서 아들은 가출 대신 히키코모리(폐쇄은둔족)가 된다.

무라카미 류는 ‘최후의 가족’(이상북스)이나 ‘공생충’(이상북스) 같은 소설에서 줄기차게 히키코모리 현상을 다루었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등교 거부에 이어 히키코모리가 된 십대 남아인데, 이들의 고약한 특징은 상습적으로 어머니를 구타하는 것이다. 이들이 아버지를 구타하지 않고 어머니를 구타하는 것은, 아직 아버지에게는 자본주의에 완전히 거세되지 않은 근육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구타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자신의 근육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어머니를 구타하는 이유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큰 금지 권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아이를 기를 때 아버지가 엄한 역할을 맡고, 어머니가 다독이는 역할을 맡았다. 엄부자모(嚴父慈母)의 원칙이 그것이다. 그런데 남편을 회사에 빼앗긴 현대 사회에서는 어머니가 양육의 모든 것을 전담하면서 전통적인 자모뿐 아니라 엄부의 역할마저 떠맡게 되었다. 이런 양육 구조 속에서 아이는 가끔씩 나타나 사랑을 듬뿍 안겨주고 황망히 떠나는 아버지보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억척스러운 어머니를 더 미워하게 된다. 예컨대 아이들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보물(노트북, 핸드폰)을 지키고 있는 괴수가 어머니라는 것을 잘 알며, 황금 양털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키고 있는 용을 죽여야 한다고 배웠다.

바로 이런 구조가 문제로 불거진 것이, 이순영 어린이의 동시 ‘학원 가기 싫은 날’이다. 윤보라 외 4명의 필자가 쓴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현실문화)에 한 편의 글을 실은 임옥희는 문제의 잔혹 동시를 인용한 다음, 시에 등장하는 화자의 모성 증오를 이렇게 분석한다.

“아이는 취약하고 무기력한(helpless)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절대적인 보호와 보살핌이 필요하다. 아동기를 거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없고, 그런 의미에서 아이의 취약성과 무력함은 인간의 조건을 구성한다. 그런 인간의 조건으로 인해 무력한 아이는 보살펴주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아이는 보살펴주는 자에게 사랑만큼이나 증오심도 투사한다. 아직 자신과 외부 세계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미분화 상태인 아이는 자신의 의존성을 상대가 의존하도록 만든다고 여기기 때문에 모친 살해 충동에 사로잡힌다.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엄마가 일방적으로 도맡아서 한다면, 이런 환상적 드라마 속에서 엄마라는 여성은 애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임옥희의 분석은 일차적으로 학원가기 싫은 아이의 모성 증오 심리를 파헤치는 것이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저 대목이 현재 한국에서 급증하고 있는 여성 혐오에 대한 풀이로도 전용가능하다는 것이다. 모성 증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머니에게 자신의 전부를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가, 어머니를 자신의 욕망대로 조종하지 못한 데서 느끼는 좌절감이 원인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자기 내부의 경쟁과 불평등으로 생겨나는 폭력을 무마하기 위해 여성의 본성이라고 가정되어 온 모성에 절대적으로 의지해 왔으며, 많은 남성들은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여성 혐오는 자본주의 사회가 부여한 ‘절대’와 남성 가부장제의 ‘당연’이 여성으로부터 부정된 시점에 생겨난다. 여성 혐오는 남성과 여성을 분리 착취해 왔던 산업 혁명이 파열된 지점이다.

장정일 소설가

*알립니다

소설가 장정일씨의 기명칼럼을 월요일자에 격주로 새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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