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 혐오현상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여성, 성소수자, 다문화가족,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혐오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며, ‘혐오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를 지울 수 없다. 한국 최초의 다문화 비례대표 국회의원인 이자스민에 대한 혐오글들은 이제 언급하는 것 조차 민망하다.

약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들은 급기야 ‘노인충’, ‘무임충’, ‘급식충’, ‘맘충’ 등 특정한 사람들을 ‘벌레’라고 지칭하는 양상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 혐오가 우리의 일상적 공간들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혐오의 일상화’속의 혐오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은, ‘혐오자’들의 ‘절대적 확신’이다. 그들은 혐오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결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그러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실은 엄청난 ‘인식의 오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임마뉴엘 칸트는 철학사에서 중요한 사상가 중의 하나이다. 나는 그가 특히 세계의 영구적 평화를 위한 제안을 하면서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 사상에 근거하여 ‘코즈모폴리턴 권리’라는 주제를 정치영역으로 확장한 점에 주목한다. 칸트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세계화 이후 난민, 망명자, 이주 노동자들, 미등록 이주자들 등 국가적 경계들을 넘어서는 심각한 문제들이 등장하면서 철학, 정치학, 법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간주하는 사회를 칸트는 ‘목적의 나라’ 라고 명명한다. ‘목적의 나라’ 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칸트의 이상은, 이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인간들은 이 코스모스에 속한 ‘동료 시민’이며, 따라서 자유롭고, 평등하고, 그리고 합리적 존재로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원리에 근거한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72개 종류의 과목들을 가르쳤는데, 그 중 지리학 48번, 인류학 24번, 논리학 54번, 형이상학 49번, 도덕 철학 28번 그리고 이론물리학 20번을 가르쳤다. 대학에서 강의과목 수를 줄이려고 할 때도, 지리학 과목은 포기하지 않았다. 1756년에 지리학을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 1797년 은퇴할 때까지 지리학을 40여 년 가르친 것이다. 그는 ‘인간 지리학’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고,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더운 나라에서는 인간의 모든 측면들이 조숙하지만, 그 열기로 인해 완벽에 이르는 성숙을 이룰 수 없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완벽성은 백인종에게서 이루어진다. 황인 인디언들은 미약한 재능만을 지니고 있다. 니그로는 그 황인 인디언들보다 한참 밑이며, 인종들 중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은 아메리칸 원주민들이다.” “개들 조차도 유럽으로부터 아프리카로 가져 오면 점점 멍청해지고 뻔뻔스러워지며 계속 비슷한 새끼들을 생산하게 된다.”

또한 습기 차고 더운 지역에서 인간이 살 게 될 때에는 모든 흑인들에게서처럼 지독한 냄새가 나고 게으르며, 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어서 노예제도와 같은 제도들을 통해서 왕에 의하여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칸트는 주장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가장 완벽한 이상적인 인종은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겸비한 독일인이라고 결론내린다.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되는 칸트가, 그 지독한 ‘인식의 오류’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민족이나 국적 등에 상관없이 인류 전체가 서로 ‘동료 인간’임을 강조한다. 단지 이 ‘지구상에 거하는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 모든 이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코즈모폴리턴 권리’의 실현이, 세계평화를 위하여 요청된다고 제안한다. 그런데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이들의 평등과 권리를 주장하는 그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에 대하여 어처구니 없는 ‘인식의 오류’를 드러내고 있다. 지독한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각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칸트와 같은 ‘인식론적 사각지대’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현실세계에는 여전히 성 차별, 인종 차별, 성소수자 차별, 나이 차별, 장애인 차별, 다문화가정 차별, 지역 차별, 학력 차별 등 다양한 차별과 혐오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한 종류의 차별에 예민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차별이나 혐오로부터 자동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1960년대 이후 세계의 사회변혁운동사를 들여다 보면 남성인권운동가들의 성차별주의, 또는 여성운동가들의 인종, 계층차별주의 등의 문제는 종종 드러나고 있는 문제들이다. 어느 한 종류의 차별의 부당성에 저항하는 사람이, 다른 종류의 차별은 스스로 가담하고 있는 ‘패러독스’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경험과 이해 능력의 한계성으로 인한 ‘인식의 사각지대’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인종에 대한 인식의 오류가 인종차별주의를 정당화하는 데에 쓰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각자가 지닌 이러한 인식의 오류가 우리 사회 곳곳에 있는 다양한 모습의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편견, 그리고 차별을 묵인하고,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것에 일조할 수 있다. ‘칸트의 패러독스’는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인식론적 사각지대’를 드러내는 예증이다. 내 안의 인식의 오류와 그 사각지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부단한 비판적 자기 성찰, 지속적인 자기 학습, 그리고 자신의 인식세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열정이 요청된다. 자신 속의 인식의 패러독스를 넘어서기 위한 치열한 노력은, 이 땅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지속적인 과제이다. 한국사회가 ‘혐오사회’를 넘어서 ‘평등사회’로의 전이를 이루는 데에 ‘필요조건’인 것이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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