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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사전] 혼밥

입력
2015.08.2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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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신화'의 김동완. 그는 이른바 '혼밥'의 달인이라고 불린다. MBC '나 혼자 산다' 방송화면 캡처.
그룹 '신화'의 김동완. 그는 이른바 '혼밥'의 달인이라고 불린다. MBC '나 혼자 산다' 방송화면 캡처.

‘혼밥’은 혼자 밥 먹기 혹은 혼자 먹는 밥의 준말이다. 몇 년 전 걸그룹 시스타의 노래 ‘나 혼자’에서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 나 혼자 노래하고”라고 쓰일 때까지만 해도 혼밥은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독특한 문화 현상이 아니었다. 그 노래의 초점은 이별의 아픔이었던 것이다. 요즘에는 혼밥을 즐기는 혼밥족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가 자주 나오고 있으며 혼밥 레벨 목록도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레벨 1은 편의점이고 8은 호텔 레스토랑 및 한정식집이다.

혼밥은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원룸 등에서의 독신 생활이 많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밥을 먹는 경우다. 이 때 공중파 TV의 쿡방이나 인터넷방송의 먹방이 하는 역할은 혼자 먹는 게 아니라는 거짓된 느낌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여럿이 먹을 때와 혼자 먹을 때의 결정적 차이가 대화의 있고 없음인데, 방송의 출연자들은 혼자 먹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준다. 이 유형에 속하는 혼밥 고수들은 고깃집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을 즐겨 이용한다.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 경쟁 시스템이 강요한 것이다. 대학생 및 취업준비생들은 학점을 따고, 스펙을 쌓고, 시험 준비를 하고, 또 그러면서 알바를 하기 위해 혼자 바삐 움직여야 한다. 신자유주의 경쟁 시스템 안에서 쫓기듯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혼밥을 한다. 이 유형의 사람들 다수는 혼밥의 자유로움, 혼밥의 편함 등을 내세우면서 혼밥의 고독을 ‘혼술’로 감당해 가고 있다.

마지막 유형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친구가 없기 때문에 혼밥을 하는 경우다. 일본의 경우, 점심 먹을 친구가 없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적 곤경과 심리적 고립감을 가리키는 말로 ‘런치 메이드 신드롬’이라는 게 만들어져 있을 정도다. 이 유형의 사람은 혼밥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게 두려워 화장실에서 김밥이나 빵을 먹기도 하는데, 이미 일본에서는 몇 년 전부터 ‘변소밥’이 사회 문제가 되었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혼자 밥 먹는 게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혼자서 여행, 출장, 영업, 외출 등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혼밥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에서는 끼니를 때우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힘들었기 때문에 “진지 드셨습니까”라든가 “언제 밥이나 하자”가 인사말을 대신해 온 게 우리 실정이었다. 동시에 또 낡은 파쇼적 집단주의가 우리의 행동과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예컨대 회식에 빠지면 절대로 안 되는 게 우리의 조직 문화다. 이런 상황에서 혼밥이란 ‘왕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여자가 혼밥을 하고 있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게 마련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 처음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현상이 일본의 독특한 혼밥 문화였는데, 이제는 한국에서도 혼밥 문화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혼자 커피 마시는 풍속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노트북을 펼쳐 놓고 혼자 앉아 있으면서 타인의 시선을 견디는 훈련을 해온 것이다. 아직 혼밥이 한국에서 타인의 시선을 일정하게 견디어내야만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그 훈련의 의미는 작지 않다. 다만, 중요한 점은 만화 ‘고독한 미식가’에서처럼 혼자서라도 맛있고 영양 많은 음식을 골라서 천천히 음미해가면서 꼭꼭 씹어가며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혼밥을 일본에서는 ‘봇치메시(외톨밥)’라고 한다. ‘혼자’란 단어의 중세 국어 형태는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ㅎㆍㅸㆍㅿㅏ’로 추정된다. 순경음 비읍이 탈락하고 반치음이 지읒으로 바뀐 다음에 니은이 추가된 게 아닐까 라고 짐작된다. 학교 문법으로만 따지자면 혼밥이 아니라 혼잣밥이 맞을 것이다.

혼밥은 한편으로 더 스피디하고 가벼운 느낌을 주며, 다른 한편으로 혼식, 독상, 독식 등 관련된 다른 단어들과도 의미심장한 차이를 이룬다. 또, 홀밥이라고 했으면 더 처량할 뻔했다. 혼밥 레벨을 열심히 쌓아가다 보면 혼크(혼자 크리스마스)도 고독사도 두렵지 않을 듯하다. 생일날 혼자서 꿋꿋하게“해피 버스데이 투 미~”할 수도 있다. 아담도 이브가 생기기 전까지는 혼밥을 했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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