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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미쳤거나 천재거나

입력
2015.08.2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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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군사적 위기 속 성사된 2+2 접촉

결과 따라 김정은 자질과 속셈 드러나

최고존엄 문제 넘어 공동 번영길 가야

사진은 조선중앙TV가 보도한 비상확대회의 모습. 연합뉴스
사진은 조선중앙TV가 보도한 비상확대회의 모습. 연합뉴스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는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의 기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정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도 막말 노이즈 마케팅이 통한다는 얘기다. 막말 제조능력으로 대통령을 뽑는다면 그는 벌써 미국 대통령이다. 한국의 허본좌보다도 확실히 한 수 위다.

엊그제는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막말 먹잇감으로 삼았다. 23일(현지시간)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그는 앨라배마주 라디오방송 쇼에 출연해 남북한 포격전 등 한반도 군사위기상황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김정은은)미쳤거나 아니면 천재”라고 말했다 한다.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불안정해 보인다”는 촌평도 덧붙였다.

명백한 지뢰ㆍ포격도발에 대해 막무가내로 오리발을 내미는 북한 행태에 분노하는 우리 국민들로서는 듣기에 좀 거북한 말일 수도 있겠다.“미쳤거나”에는 쉽게 공감이 가지만 “천재”일지 모른다는 건 또 뭐냐는 것이다. 김정은이 천재일 수도 있다니 이거야말로 우리사회 보수세력에게는 최악의 막말이다.

남북이 피차 전면전도 불사할 태세다. 6ㆍ25 이후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 위기 국면을 초래한 방아쇠는 북한이 당겼고, 북한체제 구조상 김 제1위원장의 의지가 직접 작용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사태가 어떤 형태로 매듭지어질지 속단할 수 없으나 남북관계의 분수령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 이후의 득실에 따라 김정은이 자충수를 두었는지, 묘수를 두었는지가 판가름 난다. 그가 천재인지 모른다는 트럼프의 진단도 그때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의 전개과정을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는 김정은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느낌을 받았다. 북측이 지뢰도발에 대한 우리군의 보복 조치인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군사행동을 개시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왔을 때만 해도 변덕스럽고 물불 안 가린다는 김정은이 무슨 짓을 감행할지 우려가 앞섰다. 하지만 결과는 남북간에 일찍이 없었던‘2+2 고위급 접촉’이다. 군사적 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다음 협상 테이블을 이끌어 낸 셈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단 김정은의 승부수가 통한 게 아닌가 싶다.

문제는 여기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느냐다. 이번 사태 배경을 놓고 북한이 내달 3일의 전승절 잔치를 앞두고 있는 중국을 겨냥했다거나, 결국 중국의 압력으로 남한과의 대화에 응했느니 하는 분석들이 구구하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핵심은 이른바 북한의‘최고존엄’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나 북한주민 인권문제, 공포통치 등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이 있을 때마다 북한은 최고존엄을 모독했다며 격렬하게 반발해왔다.

갖은 수단을 동원한 보복도 다짐했는데 말대로라면 최고존엄을 모독한 청와대와 관련 단체, 언론사는 벌써 초토화되고도 남았다. 이번 사태 발단이 된 비무장지대 지뢰도발도 북측이 무수히 공언해온 보복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우리군의 대대적인 대북 심리전 방송 재개를 초래함으로써 되로 주고 말로 되돌려 받은 꼴이 됐지만.

김정은 체제에 대한 분명한 인정, 즉 최고존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번 2+2고위급 접촉에서 어떤 합의가 이뤄진다 해도 잠정적인 봉합에 그칠 수밖에 없다. 북 도발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도발의 근본 배경인 최고존엄 문제를 해결하고 가야 한다는 얘기다.

일련의 도발에 대한 시인 및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얻어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간 교류협력을 통한 상생, 나아가 연해주, 유라시아 등 북방으로 진출해 한민족의 활로를 열어 나가려면 북한의 협력, 즉 김정은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나는 김 제1위원장이 미친 게 아니라 그런 비전을 우리와 공유하는 천재였으면 좋겠다. 국가보안법 위반적, 혹은 종북적 사고라고 비난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민족의 공멸을 피하고 번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간절한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일 뿐이다.

수석논설위원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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