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더하기 씀] ③ 그림자 나라로 오세요

문을 빼꼼 연다. 사방이 캄캄하다. 이곳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호기심이 들면 언제든지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시라. 빛으로 채워진 세계 너머, 어둠이 모여 형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삶을 가꾸는 ‘그림자 나라’가 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문턱은 누구나 넘어설 수 있지만 그 전에 먼저 일상에 찌들어 고정된 것들만 보려 하는 낡은 시선의 습관을 떨쳐내야 한다. 손잡이를 밀어낸 순간 “끼이익―”하고 낡은 문틈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으로 기대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 순간 당신은 이런 낯익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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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바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소리다. 그림자 나라를 탐험하려면 준비물이 하나 필요한데 그게 바로 카메라다. 태어날 때부터 신체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눈이라는 기관은 이미 빛이 지배하는 세계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형상들을 감지하는 일에는 영 무딘 듯하다. 환하게 드러난 대상도 제대로 못 보고 사는데, 꼭꼭 숨어있는 그림자까지 주목하면서 다니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그러나 사람들은 눈이 못 보는 것, 보아도 담지 못하는 것, 담아도 떠올리기 힘든 것들을 보기 위해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를 발명했다. 이제 보인다! 맨눈으로만 보기엔 아까운 세계 이상의 세계, 혹은 이쪽 너머의 광경이 초점에 맺힐 때 얼마나 신기한지. 인화지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눈을 보충하고 때로는 대리하는 기계인 카메라는 육안으로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맹점(盲點)을 볼 수 있게 만든다. 다시 말해 시각을 대리보충하기 위해 최적화된 사물이라고나 할까. 언젠가 그림자들을 찍어놓은 사진을 보고 나는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카메라는 맹목(blindness)의 시선으로 세계를 본다.” 카메라의 시선이 포착해낸 맹목의 세계,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림자들이다. 빛의 세계가 감추고 있던 것,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들의 창고를 열기 위해 나는 가끔 그림자 나라로 간다. “찰칵, 찰칵”

‘사진(photography)’이란 단어의 어원을 떠올려보자. ‘photo’는 ‘빛’, ‘graphy’는 ‘그림’이란 뜻을 갖고 있으니까, 이 둘을 합치면 ‘빛으로 그린 그림’ 이 된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어둠은 빛이 차지하고 남은 부분, 즉 잉여 취급을 받았던 거다. 하지만 사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사진에서 빛만큼 중요한 건 그림자라는 사실을. 환한 빛에 대비되는 음영의 적절한 농담(濃淡)과 무드(mood)가 얼마나 사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가? 적절하게 투사된 그림자야말로 사진 속에 불어넣은 ‘영혼’과 같은 존재다. 나는 내 맘대로 사진을 ‘어둠이 그린 그림’이라고 부르련다. 그래도 사람들은 다채로운 빛에 주로 시선을 고정시키기 마련이다. 근대 이후 이성, 깨달음, 선은 곧잘 빛에 비유되곤 했다. 오죽하면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했을까. 어둠은 미망, 무지, 심지어 악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쓰였으니, 이성을 우위에 두는 세계에서 빛이 주연을 차지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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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어둠이 칙칙하고 단조롭다는 편견을 깨버리게 하는 두 장의 사진이 있다. 한강변에 나와 환한 빛을 등지고 공놀이와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약간 재주를 부려서 그림자와 실체의 위치를 바꿔놓았다. 그림자에는 얼굴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색조도, 입체감도 지워진다. 그림자는 삼차원의 이미지들을 평면으로 바꿔놓는다. 그 대신 명암을 가르는 경계선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어 보인다. 이렇게 이차원으로 압축된 그림자에는 독특한 동적 리듬감이 실린다. 마치 순수한 움직임만 남겨두고 실체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보낸 듯한 느낌이랄까? 분명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한데, 다를 리가 없는데도 다르게, 익숙하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얼까? 아마도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가려져 있었던 것, 있으나 마나하다고 여겼던 것이 시선의 정면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가, 이렇게 그림자와 실체의 자리를 바꿔놓으니까 이제 어쩔 수 없이 어둠에 먼저 시선을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 사진들은 그림자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생각보다 역동적이고 경쾌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새삼 상기시켜 준다. (잠깐! 주제에서 조금 벗어난 얘기지만, 나는 사진을 볼 때마다 평소엔 무심하게 지나치던 세계의 이면 구석구석에 참 이런저런 색다른 형상들이 많이도 숨어있구나, 깨닫곤 한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이 복잡하고 은밀한 세상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상상에 잠기곤 한다.) 물론 그림자는 빛만큼 선명하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포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재미있는 그림자 이미지를 얻으려면 계절과 시간에 따른 빛과 어둠을 읽어내는 밝은 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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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엔 그림자가 이렇게 낯설지 않았던 듯싶다. 깊은 밤 스탠드 불빛을 이용해 손을 오므리고 펴서 비둘기도 만들고 여우로 둔갑시키는 그림자놀이를 즐겼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친구들과 상대방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그림자밟기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그림자가 인간을 시샘해 자리를 바꿔치기하는 이야기나 벽 속에 있는 그림자 유령이 아이들을 납치해가는 동화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하면 요즘은 누구나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어디에나 빛, 빛, 빛이 넘쳐난다. 한때 그림자는 생활의 일부였었는데 지금은 화려한 빛에 가려 더 이상 아무도 이를 의식하고 살아가지 않는다. 조명이 흔해지고 각종 기기가 발달해 어둠이 밀려난 것일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빛이 강렬하면 할수록, 그에 반비례하여 어디선가 어둠은 점점 더 짙게 자라나기 마련이다. 단지 빛과 그림자를 구별하고, 어둠을 의식하고, 이를 음미하는 감각이 점점 더 무뎌져 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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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주인을 따라 산책 나온 강아지의 모습이 앙증맞다. 위의 사진은 그물 모양의 울타리가 만든 그림자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마치 이 세상이 아닌 색다른 공간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준다. 비스듬히 보면 그물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메라는 주변의 불필요한 요소를 배제시켜 산책 나온 거리를 즉석 무대로 만든다. 아이들을 유혹해서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자 나라로 데려가는 혼령이 등장하는 그림책 표지로 쓰면 딱이다. 이제 슬슬, 빛이 아닌 어둠이 만들어낸 형상들의 조합에 눈이 익숙해질 때가 된 것 같다. 각양각색의 그림자들을 이리저리 멋대로 이미지들을 끼워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될 쯤, 마침내 우리는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전복적인 힘을 발견하게 된다.

제135회 이달의 보도사진상 art&entertainment부문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김주영 기자의 '그림자 산책'

위 사진은 남산N타워 전망대에서 수십m 아래의 행인들을 내려다보고 찍은 모습이다. 높은 위치에서 촬영해 수직으로 세워진 사람들의 모습은 짜리몽땅하고, 그림자들은 사광(斜光)으로 내리비치는 햇빛으로 인해 길게 수평으로 드러누웠다. 어쩌면 행인들은 제 갈 길을 가느라 발뒤꿈치에 붙어있는 자신의 긴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도심 한 가운데서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들의 형상들이 기이하다. 한편으로는 그림자들이 거대한 무대 위에서 음악에 맞춰 집단 군무를 펼치는 장면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소설가 황정은은 ‘백의 그림자’란 소설에서 한없이 왜소해진 인간을 밀어내고 벌떡 일어선 그림자의 모습을 묘사한 적이 있다. 그림자의 일어섬, 이 사진은 바로 그러한 결정적 순간을 우리에게 목격하게 한다.

이쯤 되면 그림자들이 사람들을 밀어내고 또 다른 나라를 만드는 상상도 하지 말란 법이 없다.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일상에 시달리다보면, 때론 빛을 배경으로 평화롭게 펼쳐진 그림자의 나라로 망명을 신청하고 싶어진다. 눈, 코, 입, 모두 지워진 적요한 세계로... “찰칵!!!”

이직 기자 jk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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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3월25일자 View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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