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가 발표된 14일 오후 서울역을 찾은 시민들이 TV를 시청하고 있다. 이 담화에서 아베 총리는 '과거형'으로 사죄를 언급하면서도 침략과 식민지배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지난주 일본 민주당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당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는 2010년 민주당 정권 때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의 한일강제병합 100년 담화 작성에 외무장관으로 참여했다. 일본정가에선 지한파로 분류된다. 당대표 취임 1주년을 맞아 나름 야심차게 방한해 ‘야당외교’를 펼쳤지만, 도쿄로 돌아온 그에게선 왠지 활력이 보이지 않는다. 남성적인 외모와 달리 현실은 힘에 부친다.

방한 당시 박 대통령에게 위안부 할머니 고통을 얘기하며 “일본정치가로서 부끄럽다”고 말한 대목이 극우진영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다. 일본 우익매체는 한국에서 그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해 “저런 분이 일본총리가 돼야 한다”는 반응이 있었다거나, 역사전쟁에 이용만 당하고 돌아왔다고 맹비난했다.

지금 도쿄의 국회의사당에는 거대여당의 집단자위권법 참의원 통과가 눈앞에 놓여 있다. 유난히 뜨거운 올 여름 오카다의 민주당은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는 야당의 무기력함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흔히 한국사회의 보수우위 정치지형을 설명할 때도 이런 표현이 쓰이지만 일본의 정치지형은 더 심각하다. 당장 자민당의 안보법안 처리를 민주당이 막아낼 수 있을까.

고심 끝에 떠오른 게 ‘우보(牛步)전략’이다. 국회에서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합법전술로, 유엔평화유지활동(PKO)법안을 심의한 1992년 일본의 야당은 ‘1m 가는데 1시간’ 작전으로 처리시한을 넘겨 폐기시키려 했다. 해외사례로 2000년 뉴질랜드 의회에선 야당이 장시간 연설뿐 아니라 통역시간이 추가 소요되는 마오리족 언어를 쓰는 방식으로 고용관계법을 일주일 지연시킨 적도 있다. 그러나 일본 참의원에선 당시 5일째 심야공방 끝에 1건을 표결하는데 13시간이 소요됐지만 법안 통과는 막지 못했다.

게다가 이듬해 7월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은 참패했고, 이후 당명까지 바꿨지만 퇴조하게 된다. 당시 패배의 잔상이 트라우마로 남아서인가. 민주당은 이를 교훈 삼아 중요법안은 여당의 수정안협의에 협조하며 이익을 관철하는 전략을 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안보법안은 위헌’이란 반대여론에 기대며 수정협의에 응하지 않는 강경입장이다. 그러자 당내 보수진영이 “저항 야당만으론 버림받는다”며 “대안을 내놓는 수권야당”을 내세우면서 내부 분란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 내분은 심각한 수준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오카다 대표의 ‘당수토론’이 열린 5월20일. 국회에서 두 사람은 불과 1m 남짓한 거리에 마주선채 말로써 사무라이식 결투를 벌였다. 그런데 우리 국회가 동료의원 발언이 끝나면 “잘~했어!”를 외치듯, 양당이 응원총력전을 펼치는 현장에서 민주당 보수파 리더격인 호소노 고시(細野豪志) 정조회장은 의석을 비웠다. 이는 당내분란의 상징적 장면으로 해석됐다. 하야시 구미코(林久美子ㆍ여) 참의원의 경우는 당직을 갖고도 당내논의에서 배제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2년 전 자민당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의원과 결혼했기 때문으로 의심되고 있다.

민주당의 내부 분열상을 보면 야권통합 논의에서 유신의당 대표가 주도권을 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요미우리(讀賣)신문 등의 여론조사에선 정권교체가 좋다는 응답이 70%나 나왔지만, 자민당 비판층은 야당지지자가 아닌 무당파가 주류다. 아베 만큼이나 강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때도 민주당은 지지율이 최고 30%대였지만 요즘은 한 자리 수에 그칠 때도 적지 않다.

지금 일본엔 아베 정권의 폭주를 우려하는 거대한 반대목소리를 제도적으로, 실질적으로 담아낼 통로가 없어 보인다. 들불처럼 번지는 시민들의 ‘전쟁법안 반대’ 시위와 뜨거운 민심을 결집시키지 못하는 빈곤한 야당. 이것이야말로 일본 정치의 위기,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위기일지 모른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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