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성의 일상 속 자연 누리기 (3)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6년 8월 9일,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대에 섰다. 하계 올림픽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시상식이어서 독일 총통 히틀러가 직접 손 선수에게 금메달과 월계관, 그리고 부상으로 참나무 묘목을 수여했다(손 선수의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어 시상식장엔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일장기가 게양됐다. 이때 식민지 청년 손기정은 속으로 피울음을 토했다고 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손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실었다가 정간 조치를 당했다).

손 선수가 가져온 묘목은 서울 중구 만리동 옛 양정고 교정에 심어졌고, 지금은 수형이 우람한 거목으로 자랐다. 한동안 이 나무는 월계수로 잘못 알려졌으나 양정고가 서울 목동으로 이전해 간 뒤 서울시 기념수로 제정되는 과정에서 참나무 일종인 핀오크(pin oak)로 밝혀졌다.

히틀러가 왜 마라톤 우승자에게 월계수가 아닌 참나무 잎 월계관을 씌워주고 참나무 묘목을 수여했는지는 뒤에 얘기하기로 하고 우선 핀오크부터 보자. 우리말로 대왕참나무라고 불리는 이 나무를 요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아파트 녹지나 도심 소공원, 골프장 등의 조경수로 각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고 있다. 이름이 다소 생소하지만 이미 우리 일상 속 자연의 일부로 자리 잡은 지 꽤 된 것이다.

새 잎이 갓 피어난 핀오크.

속성수인데다 도시공해에 강하고 피라미드형 수형이 아름다운 게 조경수로 인기를 끄는 이유다. 4월 말 5월 초 연두색 신록이 싱그럽고, 한여름의 짙은 녹색 잎도 좋다. 특히 10월 말쯤 주홍색으로 물드는 단풍은 일품이다. 미국 동부 저지대가 고향인데, 어느 해 늦가을 워싱턴에 갔을 때 웰링턴 국립묘지 등 곳곳에 화려하게 물든 핀오크 단풍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참나무의 일종인 만큼 도토리가 열린다. 만추의 거리를 지나다 이 나무를 만나 발로 툭 차면 도토리가 우수수 떨어진다. 구슬처럼 동글동글한 도토리는 얼마나 앙증맞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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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오크 도토리. 참나무 종류 도토리 중 가장 동글동글하다.

핀오크란 이름은 줄기와 가지에 핀처럼 생긴 작은 잔가지가 삐죽삐죽 나와 있어 붙여졌다고 한다. 비슷한 나무로 루브라 참나무가 있다. 이 역시 북미주가 고향인데 잎 가장자리 톱니가 핀오크에 비해 다소 완만하다. 그러나 잎이나 전체적인 나무 모양으로는 구별이 쉽지 않고, 핀오크 도토리보다 길쭉한 도토리를 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루브라 참나무는 조경수보다는 용재생산용으로 많이 심고 있다.

이제 손기정 선수가 받은 월계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고대 그리스에서는 뛰어난 시인이나 개선장군 등에게 월계수 잎으로 만든 월계관을 씌워주었고, 이 후 월계관은 영예로운 관을 의미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올림픽과 같은 체육경기 우승자에게는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을 씌워주었다고 한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근대올림픽 1회 대회 때도 올리브 가지 관을 수여했다. 그 이후 올림픽 개최국들은 자기 나라를 상징하거나 자국 특산나무 잎으로 월계관을 만들어 우승자에게 씌워주게 되었고, 베를린 올림픽 때 독일은 참나무 잎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손 선수에게 준 묘목이 하필이면 원산지가 미국인 핀오크였을까. 묘목 관리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독일 게르만 민족은 참나무를 신성시하고, 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나무 같은 것이다. 독일서 발행하는 유로화 동전 1,2,5센트 뒷면에는 독일참나무(robur)잎이 새겨져 있을 정도로 독일사람은 자국산 참나무를 좋아한다. 히틀러가 베를린 올림픽을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독일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독일참나무 잎으로 월계관을 만들어 우승자에게 수여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왼쪽)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식 사진. 두 손으로 든 것이 핀오크 묘목. 당시 동아일보는 이 사진을 손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채 실었다가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다.(오른쪽) 옛 양정고 교정인 손기정 체육공원 내의 손기정 참나무.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 우승 부상으로 히틀러에게서 받은 묘목이 이렇게 우람하게 자랐다.

손기정 기념관에 보관중인 월계관을 자세히 살펴보면 떡갈나무 잎 비슷한 독일참나무 잎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묘목은 알면서 일부러 미국원산 핀오크를 줬을 리 만무하다. 당연히 독일참나무 묘목이라고 생각하고 수여했을 텐데 나중에 자란 나무를 보니 미국원산 핀오크였던 것이다. 어린 나무는 품종이 달라도 모양이 비슷비슷해서 묘목관리자가 착오를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를 패퇴시킨 게 미국인데, 히틀러는 적국의 특산참나무를 마라톤 우승자에게 직접 수여했던 것이다. 참으로 기구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 핀오크가 본격적으로 도입돼 조경수로 식재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로 알려졌다. 물론 옛 양정고 교정에서 거목으로 자라고 있던 핀오크와는 전혀 관계 없이 조경업자들이 미국에서 들여왔다. 그 과정에서 대왕참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처음 묘목을 들여온 종묘사 상호가 대왕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짚이는 점이 있긴 하다. 외국에서 들여온 소나무 종류 중에 대왕솔이라는 게 있다. 미국 동남부의 저지대가 원산지다. 솔잎 하나 길이가 30㎝가 넘어 대왕솔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이 대왕솔의 학명은 Pinus palustris. 그런데 핀오크의 학명이 Quercus palustris다. 누군가 이 학명의 유사성에 착안해 핀오크에 대왕참나무라는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두 나무의 종소명 palustris는 저지대 물가에 사는 식물이라는 뜻일 뿐 ‘대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마디로 대왕참나무라는 명칭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정체불명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핀오크를 손기정참나무 또는 손참나무로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나라를 잃고 비탄에 빠졌던 우리 민족에 큰 기쁨과 희망을 선사했던 손기정 선수를 기리는 뜻에서다. 그가 받아온 참나무 묘목에 얽힌 사연도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

wkslee@hankookilbo.com

핀오크 단풍. 미국 동부 지역은 가을에 이 나무 단풍이 특히 아름답다. 오른쪽 아래는 여름철에 볼 수 있는 녹색의 핀오크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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