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톡 2030] 전통시장의 청년상인들

전주 남부·광주 대인예술시장

남미 전통악기 파는 페루 음악도부터

대기업 나와 차린 여행상담소까지

색다른 아이디어로 활력 불어넣어

광주 대인예술시장에서 ‘까불이’로 통하는 김영빈(노란색 바지), 신준섭(손을 든 이)씨가 시장 곳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흥을 돋우고 있다.

전통시장하면 어쩐지 젊은 이들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다. 낡은 건물, 지저분한 거리, 왠지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진열대까지. 백화점과 마트, 편의점 주변에서 성장한 도시 청년들은 어쩌면 태어나 한번도 전통시장에 가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통시장에서 창업한 20~30대 청년 장사꾼들이 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통통 튀는 사업 아이템을 갖고 과감히 이 곳에서 도전장을 던졌다. 단지 취업하기 힘들어 마지못해 창업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들 덕에 시장은 한층 젊어지고, 활기도 넘친다. 이들은 대체 왜 전통시장을 택한 걸까. 33개 이색적인 가게가 입점한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과 초창기 시행착오를 거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광주 대인예술시장을 찾아 20~30대 청년 장사꾼 4명에게서 그 사연을 들어봤다.

페루 음악도 마르코 메르마(오른쪽)씨가 기타로 페루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왼쪽은 그의 한국인 아내.

페루·라틴 문화 제대로 알려야죠.

전주 남부시장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청년몰을 찾은 손님들은 이색적인 물건이 즐비한 ‘아모르 페루아노’(스페인어로‘페루 사랑’이란 뜻)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 곳에선 페루인 마르코 메르마(29)씨가 화려한 전통 의상, 전통악기 께냐(quena)와 삼뽀냐(zampona), 악몽을 막아주는 드림캐쳐 등 장식품, 알파카 털로 만든 인형, 현지 화가가 그린 그림 등 각종 현지 물건을 판매하고 있다. 마르코씨는 “속칭 보따리 장사로 들여오는 걸로 착각하는 손님도 있지만 모두 고국에 있는 어머니가 페루 전역을 돌아 다니며 직접 구해 보내준 것”이라며 “물건을 사지 않아도 페루와 라틴 문화에 관심을 가져주거나 서로가 관심 있는 분야를 주제로 대화하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마르코씨는 페루 국립 산오거스틴대학에서 전통악기를 전공한 음악도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생고생 학비를 벌다가, 졸업을 1년 앞둔 2012년 지인의 소개로 전주 소리축제에서 공연을 하게 돼 이곳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전주에서 라틴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정부가 지원하는 청년몰에서 2013년 12월 페루와 라틴 문화를 한국에 소개한다는 취지로 상점을 열었다.

그는 상품이 아니라 문화를 판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3월부터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저녁 7시 청년몰에서 페루 전통악기로 정기공연을 하고 있다. 지난해 6월엔 매주 화요일 ‘노래로 배우는 스페인어’무료강좌도 시작했다. 페루 전통음악에 관심을 보이는 손님들에겐 즉석에서 께냐와 삼뽀냐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페루를 종종 잘못 이해하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 얼마 전 한 케이블 TV의 여행프로그램을 통해 페루 현지에서 하루 7,000원으로 숙박 가능하고, 라마가 침 뱉는 동물로 소개됐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마르코씨는 “헐값에 숙박하는 곳은 현지인도 이용하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위험한 곳”이라며 “매우 온순한 동물인 라마가 침을 뱉는 건 정말 괴롭거나 힘들 때 나오는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마르코씨는 큰 꿈을 꾸고 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등 영향으로 장사가 잘 안 되고, 보육교사를 하던 아내도 올해 초 일을 그만둬 형편이 어렵지만, 중단한 음악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집에 조그만 스튜디오를 제작 중이다. 마르코씨는 “어릴 적 성당에서 신부님과 수녀님을 통해 음악을 배워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며 “여건이 되면 나처럼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사표를 던지고 장기 세계일주를 다녀온 뒤 상담소를 낸 ‘무모한’ 청년 최보윤씨. 그가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을 여행할 때 찍은 사진이 담긴 엽서를 소개하고 있다.

대기업 그만두고 세계일주 후 상담소 차리기도

마르코씨 가게 옆에 있는 ‘달세상’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볼리비아의 소금 사막인 우유니 사막, 붉게 물든 스웨덴 항구의 석양, 웅장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남미 이과수 폭포, 인도인들이 신성시 하는 갠지스강 풍경, 호주에서 1만4,000피트(4.2㎞) 상공에서 스카이다이빙 하는 모습 등이 담긴 엽서들이 벽면 곳곳에 진열돼 있다. 주인 최보윤(34)씨가 1년 9개월간 세계일주를 하면서 찍은 6만5,000여장의 사진 중에 엄선해 제작한 엽서들이다.

그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대학 졸업 후 모두가 선망하는 대기업(삼성전자)에 입사했지만, 오전 8시에 출근해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저녁 10시에 별을 보며 귀가하는 일상이 매우 답답하고 고되게만 느껴졌다. 입사 3년 만에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정도. 일한 만큼 대가를 받지만 주말마저 출근해야 하는 상사 동료들을 보면서 그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바로 세계여행이었다.

마침내 2008년 5월 직장을 그만 두고, 배낭을 짊어진 채 세계일주를 시작했다. 모아둔4,500만원으로 2년여 동안 전 세계 42개국을 일주했다. 세계 여행을 통해 그는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귀국 후 실천에 옮겼다. 학창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상담(라이프 코칭) 공부를 시작했고, 혼자서 손금공부도 했다. 그리고 2013년 청년몰에서 여행 및 인생 상담소인 ‘달세상’을 마련했다. 그는 “어릴 적 내성적인 성격을 독립적이고 자립심 강한 성격으로 바꾸고 싶었고, 고된 직장생활과 세계 여행 등을 경험하면서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자칭 ‘모티베이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통시장에서 상담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상담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고민거리를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멀리 떨어지거나 또는 조용한 곳에서 진행하는 게 더 편리할 수 있다. 외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많고, 점포도 여러 상점이 몰려 있는 1층이 아니라 건물 2층에 자리잡아 오히려 상담에 안성맞춤”이라고 말했다.

손님들은 세계여행과 상담문의가 반반이다.‘나 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 무슨 상담이야?’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도 없진 않지만, 재미 삼아 손금을 보고 간 손님이나 상인들이 ‘정말 잘 맞춘다’며 지인에게 소개해 줄 정도로 자리는 잡혔다. “가게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 데 옮겨도 될까?”라며 조심스러운 고민을 털어 놓는 점주도 있었다.

돈벌이는 직장생활 할 때의 절반 밖에는 안 된다. 하지만 그는 남 눈치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했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 덕도 있다. 그는 “청년몰의 모토인 ‘적당히 벌고 잘 살자’가 딱 마음에 든다”며 “일도 하고, 혼자 공부나 작업을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광주 대인예술시장의 체험형 주얼리샵 ‘은누리공방’을 운영하는 염은경씨가 영문 상호를 새긴 은반지를 보이고 있다.

귀금속 상점도 전통시장이 더 실속 있어

광주 대인예술시장에 있는 ‘은누리공방’은 여느 귀금속 상점과 달리 손님들이 직접 반지나 팔찌, 목걸이 등을 제작할 수 있는 ‘체험형’ 가게다. 12일 상점을 찾았을 때도 20대 커플이 염씨의 도움으로 길이 5~6㎝, 두께 1.7㎜인 은판을 이용해 은팔찌를 만들고 있었다. 50분에 걸쳐 ‘다듬기→이름 이니셜 새기기→구멍 뚫기→열처리 및 손목에 맞게 구부리기→사포질→은판과 체인 연결’ 6단계를 모두 마친 커플은 직접 만든 팔찌를 서로의 손목에 채워주며 신기해 했다. 가게 주인 염은경(28)씨는 “다소 투박한 게 핸드-메이드의 매력”이라며 “개성 강한 젊은이들의 욕구와 제품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보석감정사를 꿈꿨다. 호텔에서 보석감정사로 일하며 대학에서 강의도 하는 이모의 영향이 컸다. 학업 성적이 우수한 편이라 부모님은 남들처럼 공무원이나 회사원 같은 무난한 길을 가주기 바랐지만, 염씨는 광주대 금속공예과에 진학했다. 그는 한 학기 동안 일본 교토조형예술대학에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한국과 미국에서 보석감정사 자격을 취득할 정도로 전공에 공을 들였다. 졸업 후에는 주얼리 회사의 홈쇼핑 상품기획자(MD)로 4년 간 일하다 사업을 하고 싶어 2013년 12월 대인시장에 점포를 열었다.

그가 전통시장을 찾은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었다. 광주 시내 중심가는 월세가 최소 100만원 이상인데, 시장은 30% 안팎으로 상당히 쌌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배운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 SNS마케팅을 십분 활용, 주로 예약제로 운영하기 때문에 번화가에 있지 않더라도 큰 핸디캡이 되지 않는다. 아울러 주얼리 제작 체험에 필요한 각종 도구나 장비 등 필수품만 구매해 초기 창업 비용(1,800만원)도 가능한 낮췄다. 덕분에 현재는 매달 조금씩 수익도 낸다. 염씨는 “잘만 활용하면 전통시장만큼 알뜰하고 좋은 곳도 없다”고 전통시장 예찬론을 폈다.

김영빈씨가 광주 대인예술시장에서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로 분장하고, 곶감을 판매하고 있다.

상품 대신 ‘흥’, ‘스토리’를 팝니다.

전주예고 방송연예과 동창인 신준섭(24)씨와 김영빈(24)씨는 광주광역시 대인시장 상인들의 활력소다. 중소기업청과 광주시가 지원하는 ‘청년상인’에 선정된 이들은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상인과 손님들의 흥을 돋군다. 평일 낮 시간 손님을 찾아보기 어려울 때 몸빼바지를 입고, 쪽진 머리 가발을 쓴 할머니로 분장한 뒤 40~ 50대가 좋아하는 트로트를 틀고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신나게 춤을 춘다. 상인들은 이들을 ‘까불이’라고 부른다. 학창시절부터 끼로 똘똘 뭉친 이들은 “각종 공연이나 행사에서 일을 하다 청년 상인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사람들에게 상품 대신 ‘흥’을 팔겠다는 생각으로 점포 없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전통시장의 매력을 느낀 이들은 올해 1월 시장 안에 조그만 점포를 얻어 ‘테마 스토어’를 준비 중이다. 상품을 팔더라도 이야기를 만들어 손님들의 관심을 끌겠다는 얘기다. 직접 뛰어든 건 사업성도 충분하다고 느껴서다. 지난 1월 야시장에서 시험 삼아 혁신의 아이콘인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패러디 해 꽂감을 판매했을 때 호응이 꽤 좋았던 게 계기가 됐다. 당시 김영빈씨는 검정색 목폴라티셔츠(터틀넥)에 파란 청바지, 둥그런 안경을 쓴 잡스로 분장한 채 매장 앞에 등장해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어 ‘달콤하다는 것 그 이상, 아이 곶감’이란 주제로 “저는 오늘 3가지 혁신적인 제품을 들고 왔습니다”라고 운을 뗀 뒤 스티브 잡스 처럼 프리젠테이션 방식으로 곶감의 효능 등을 설명했다. 웃으며 지켜보던 행인과 손님들도 잠시 경청하더니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의 지인 중 곶감 장사를 하는 분에게서 구입한 50만원어치를 이틀 동안 모두 팔았다”며 “야시장이 열리는 3시간 동안 사람들이 모여들 때마다 스티브 잡스로 변신한 효과가 컸다”고 말했다. 이들은 조만간 인테리어 작업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아직은 빈약한 뿌리… 대부분 투잡·부업 수준

전주 남부시장과 광주 대인시장에서 만난 20, 30대 청년 장사꾼들은 뚜렷한 비전과 계획, 나름의 경영철학을 갖고 소신 있게 사업을 이끌고 있었다. 이들이 전통시장에서 자리 잡기까지는 전통시장 활성화 차원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중소기업청 등이 몇 년 전부터 각종 지원책을 마련한 영향이 컸다. 덕분에 뜻있는 청년들이 전통시장에 안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안정궤도에 올라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대부분 배우자가 직장을 다니거나 아니면 사업을 하면서 다른 일을 간헐적으로 병행하는 등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한 부수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 상인 저변 확대를 위한 지원도 중요하지만, 사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후속적인 조치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최근 발표한 전통시장 청년상인 창업 지원사업에는 창업 실패를 최소화하고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지원 사업이 종료한 후에도 청년상인의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도록 멘토링 시스템 지원, 협동조합 설립 등을 통한 공동이익 창출 및 수익 모델 발굴을 지원 등의 내용도 담았다”며 “지자체, 상인회, 전문가와 힘을 합쳐 일시적 지원이 아닌 지속 가능한 청년 상인 육성 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광주·전주=글·사진 박민식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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