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개혁 한숨 더 깊어가는 50, 60대

근거 약한 청년-고령층 고용대체효과

제로섬 게임으로 문제 풀어서는 안 돼

우리 집은 영락없는 개천가였다. 검은 진창 위에 더러운 오리 닭들이 돌아다니고, 덫으로 잡아 내버린 죽은 쥐들이 둥둥 떠다녔다. 복날이면 러닝셔츠를 벗어부친 아저씨들이 다리에 개를 매달아 불에 그슬렸다. 유년 기억의 한 조각이다.

지금 청와대 올라가는 길,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는 사간동의 옛 풍경이다. 당시 모두가 선망하던 서울 최(最)중심의 삶도 그랬다. 그 개천을 놀이터 삼아 오줌 멀리누기 따위 내기나 하며 놀던 아이들이 50, 60대가 됐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출생자)다. 진창의 삶을 떠올리며 성취의 자부심에 겨워하던 이들의 어깨가 요즘 부쩍 내려 앉았다.

냉랭한 시선 때문이다. 가진 것도 없이 부당한 기득권층 취급을 받고, 파란만장한 경험만큼 복합적 감수성을 가졌어도 싸잡아 꼰대로 몰리고, 행여 다중(多衆)공간 여성들 사이에 끼이면 불편한 눈초리(왠지 성추행범 다수가 그 연령대다)나 받고…, 심지어 박근혜 실정의 원인제공자로 몰려 도매금으로 비난 받는다. 결정적으로 노동개혁 논의가 기를 죽였다. 임금체계 개편이니, 고용 유연화니 하지만 “열심히 일한 당신, 됐으니 그만 떠나라”다.

다들 제가 가장 아프다지만 베이비부머의 삶도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래도 취업걱정은 안 했지 않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웬만한 대학을 나온 이들이나 그렇게 추억을 일반화할 뿐이다. 당장 생존이 다급했던 대부분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노동의 질이나 급여를 따지는 건 사치였다. 전태일에서 80년대 말까지 한국사회를 휩쓴 노동현장 운동의 구호가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는 것이지 않았던가.

결핍을 간신히 채우고 나자 기다리는 건 단절의 벼랑이었다. 그들은 부모를 부양한 마지막 세대이자, 부양을 받지 못하는 첫 세대다. 만 달러 소득 시대에 10만 달러 선진국보다 더 큰 비용을 들여 자식을 키웠으나 회수는커녕, 스스로 그저 짐이나 안 되길 바랄 뿐이다. 더욱이 취업난과 만혼으로 자식의 부모 의존기간은 하염없이 길어진다.

그래도 늘 남보다 못해준 것 같은 미안함뿐인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꿍쳐둔 돈이 있을 리 없다.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높은 50대 이상 남성 자살률은 남은 20~30년의 삶이 막막하고 끔찍한 경제적 원인이 절반이다.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 50%로 역시 압도적 1위라는 것도 그 근거다.

단 하나, 지금 젊은 세대보다 조건이 나았던 건 있다. 웬만하면 몸 누일 집 한 칸 정도는 갖고 있다는 것. 급격한 도시화 물결 속에서 변두리 하꼬방도 어떻든 시간 지나면 땅값 올라 연립주택이 되고 아파트가 됐으니까. 그래 봐야 여전히 부모 책임인 자식 결혼과 주거비용에 보태고 나면 결국은 다 부서져 날아갈 알량한 자산이다.

막다른 골목에 선 이런 그들을 대책 없이 몰아세우는 게 온당한 일인가. 그렇지 않아도 청년과 고령자는 연령별 자연스러운 직종분업으로 인해 고용 대체관계가 될 수 없다는 국내외 연구결과와 실제사례들이 널려 있다. 아마도 고용효과로 치면 겨우 10% 남짓한 소수 대기업 생산라인에서나 혹 이런 대체 갈등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베이비붐 세대 대다수는 평균 53세에 일찌감치 직장서 밀려나 다시 닥치는 대로 허드레 일이나마 찾는 이들이다. 구직청년의 경쟁자가 아닌 것이다.

사실이 어떻든 결국 청년 취업난이 나아지지 않고, 경제가 살아나지 않으면 책임은 다 베이비붐 세대가 뒤집어쓰게 생겼다. 아버지와 자식세대간 갈등 조장은 사안의 본질을 회피하고 핑계를 만드는 얕은 책략이다. 이건 문제해결 방식도 아니고, 무엇보다 모든 책임을 다 감당하고, 그래서 모든 걸 다 털어낸 세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지나친 곡해가 아닐까 싶어 졸업학기를 앞둔 아들에게 슬몃 물었다. “예, 진짜 그렇게들 얘기해요. ‘똥차’가 치워지지 않아서 우리가 취업 못한다고요.” …참 나쁜 정부다.

주필 jun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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