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자동차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파란 신호등만 고대하며 혼잡한 서울 시내를 오가는 자체가 별로 재미가 없다. 갑자기 끼어든 차량에 놀라 엉겁결에 내던진 욕지거리도 속 풀리는 배설이 아닌 탓에 그다지 개운하지가 않다. 무엇보다 왠지 모를 ‘신경전’이 가득한 도로 위에서 눈에 불을 켠 채 경쟁하듯 움직이는 일은 무척이나 피곤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의 노란 리본 스티커를 부착한 차량을 만날 때면 은근히 힘이 솟는다. 핏발 가득한 눈빛으로 양보 절대불가를 외치던 ‘투사’의 기개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부처님 못지않은 속 깊은 도량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종종 그 앞으로 치고 나가 마치 엉덩이를 흔들 듯 내 차의 뒤를 봐달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내 차 유리창에도 붙어 있는 노란 리본을 봐달라는 ‘아양’의 몸짓인데 노란 스티커를 부착한 차량들끼리 기분 좋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일종의 인사치레라 할 수 있다. 다만 요새 들어 스티커를 단 차량을 만나는 일이 예전보다 훨씬 줄어든 것은 못내 아쉽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초까지만 해도 도로 위의 ‘동지’를 만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는데 최근에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말 그대로 ‘세월’이 지난 탓도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일반 대중의 시선을 끌어가는 황당한 사건, 사고들이 유난히 많아 ‘세월호’ 역시 이제 망각의 바다로 휩쓸려 버린(누군가는 애타게 원했을지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한편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일이 불편할 때도 있다. 혼잡한 도로 위를 벗어나고자 종종 교통위반의 유혹에 흔들리다가도 허벅지를 꼬집으며 억지로 참게 된다. ‘기억하자’는 공감의 의지를 표명하고 다니는 마당에 타의 모범(?)이 되지는 못할망정 ‘불법행위’를 저질러 유가족이나 동지들에게 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름의 ‘양심’이라지만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근엄하게’ 예의운전에 신경을 쓰려니 태생이 ‘마당쇠’인 나로서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반대의 상황도 있다. 얼마 전 하루 종일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주차장 주인아저씨가 노란 리본 스티커를 보더니 이내 무표정을 거둔 환한 얼굴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주었다. ‘2,000원’이나 주차비를 깎아주면서 말이다. 기대하지 못한 공감의 표시에 기분이 절로 상큼해진 그날 이후 이 주차장을 단골로 이용한다.

농 섞인 듯 풀어보는 얘기지만 세월호 참사에 공감하는 이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억압의 분위기는 이미 넓고 견고하게 퍼져있다. 함께 밥술을 뜨고 차를 마시며 웃거나 울 수 있는 것이 일상성의 가치라고 한다면, 타인의 고통을 보며 아파하는 행위조차 어느새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에 입맛이 쓰리다.

‘일상’은 ‘평범함의 가치’를 뜻하는 또 다른 동의어나 다름이 없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일상이 주는 행복을 한순간에 잃은 사람들이고 진상규명을 비롯한 치유와 공감의 손길이 없는 한 오래도록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직 잊힐 일이 아닌 것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자랑스럽다는’ 태극기만 사방에 넘실대는 요즘, 내 차에 부착된 세월호 노란 리본 스티커가 여전히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하며 다시 운전대를 잡아본다. 이것은 스스로 원하는 내 평범한 일상의 가치이기에.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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