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이 교사, 교수, 종교인, 국회의원 등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불거지고 있다. 새로운 일이라기보다, 오래 전부터 ‘관행’처럼 되어왔던 일들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뿐이다. 뿐만 아니다. 다양한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서 확산되고 있는 여성혐오와 여성비하는 극도에 이르렀다. 개똥녀, 강사녀, 신상녀, 루저녀, 지하철 반말녀, 명품녀, 패륜녀, 상폐녀 등 다양한 ‘-녀’들은 물론, ‘삼일한 (여자는 3일에 한번씩 때려야 한다)’ 등과 같이 여성혐오와 비하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신조어들이 광범위하게 회자되고 있다.

지난 1월 이슬람국가(IS)에 가입했다고 알려진 김군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를 혐오한다’는 말을 남겼다. 아이러니컬하게도 IS를 악마화하는 이들이, ‘김군’의 ‘페미니스트 혐오’ 진술에는 동조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여성혐오적 논의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페미니스트’란 종종 ‘남성 혐오자’이거나 또는 ‘남성역차별주의자’로 왜곡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들의 저변에는 여성의 존재 이유를 ‘성적 도구’와 ‘출산 도구’로만 보는 가부장제적 ‘여성혐오주의’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작동되고 있다. 여성을 온전한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생물학적 기능’의 대상으로만 보는 왜곡된 시각은 사적 또는 공적 공간에서 ‘여성혐오주의’를 확산시키고 있다.

‘여성혐오주의’는 여성에 대한 두 가지 차원의 이해를 지니고 있다. 여성은 ‘위험한 존재’이며 동시에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성적 도구’로서의 여성은 언제나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라는 이해는, 강간과 같은 극도의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피해자 여성에게 우선적으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지도자 역할을 하는 주요한 직위에는 여자보다는 ‘어쨌든’ 우월한 남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여성혐오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상충적인 것 같은 여성의 ‘이상화’나 ‘혐오화’ 모두 사실상 가부장제적 남성중심주의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온 남성, 여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남성중심주의의 성차별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자연화함으로써, 결국은 각기 다른 종류의 ‘피해자들’이 되어 버린다. ‘여성혐오주의’를 내면화한 여성은 종종 가부장제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에 공모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해방’과 ‘평등’에 등돌리기도 한다.

페미니즘의 핵심적 정의는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이다. 현대의 페미니즘은 ‘여성’ 만이 아니라, 인종, 계층, 나이, 신체적 능력, 성적 성향 등에 근거한 차별에 반대하며 그 다양한 ‘소수자’들도 ‘인간’이라는 이해를 담고 있다. ‘페미니스트’란 성차별주의적 구조들에 대한 우선적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여타의 차별과 배제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이들의 ‘정치적 입장’을 나타내는 개념이 되어야 한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그 성차별적 가치와 제도에 반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정의가 실현되기 위한 변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페미니스트’인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 관한 것이며, ‘페미니스트’란 ‘생물학적 표지’가 아닌 ‘정치적 표지’이다.

페미니즘의 핵심적 정의는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이다. 한 사회의 진정한 변화는 한 특정 집단의 헌신과 기여만으로는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곳곳에 확산되어 갈 때, 한국사회가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에게 묻는가에 따라서 ‘예와 아니오’라는 두 답변이 가능하다. 이 질문을 받은 사람이 ‘여성중심주의적 페미니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생물학적 남성은 결단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남성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면, 그 ‘남성 페미니스트’의 페미니즘은 ‘플라스틱 페미니즘’일 뿐이다.

반면 이 질문을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를 본질적인 요소로 보지 않고, ‘인간’이라는 공통적 요소들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휴머니스트 페미니즘’의 입장에 서 있는 이에게 묻는 다면, 그 대답은 ‘예’이다. 다양한 종류의 배제와 차별에 반대하고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페미니스트’는 생물학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차별과 배제의 문화와 가치에 저항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사회적 소수자들과의 ‘생물학적 동질성’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동료 인간’에 대한 책임성과 연대성이라는 ‘정치적 입장’과 소신에 근거해야 한다.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가 되어 가야만 한다.’ 페미니즘은 자신의 생물학적 본질성에 근거해서 또는 여성들을 ‘위하여’ 라는 시혜적 의미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의 철학자이며 정치가 중의 한 명이었던 존 스튜어트 밀은 1869년에 나온 ‘여성의 종속’이라는 책에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성이 법과 교육을 통해 가정과 사회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초석을 놓는 데에 기여한다. 그는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남성 페미니스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여성에 대한 고질적인 성차별과 성폭력이 사라져서 더 이상 ‘페미니스트’라는 언어가 필요 없을 때까지, 생물학적 성에 상관없이 더 많은 이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어가야만 한다.

한 사회의 진정한 변화는 한 특정 집단의 헌신과 기여만으로는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곳곳에 확산되어 갈 때, 한국사회 구석 구석에 퍼져 있는 성차별, 성폭력, 성희롱, 여성혐오, 여성비하의 ‘질병’을 넘어서서 모든 이들이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존엄과 평등성이 존중되는 정의롭고 성숙한 민주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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