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독서를 좋아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한다. 심지어 중간쯤 읽었을 때 얘기하는 것도 즐긴다. 읽는다는 것은 삶의 기본적인 즐거움 중 하나이다. 몇몇 연구들은 문학을 읽음으로써 공감 능력이 커진다고 한다. 읽는다는 행위는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심오한 인간의 노력을 의미한다.

내 고향 영국은 풍부한 문학사를 가지고 있다. 고등학생일 때는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 등의 작품에 빠져 흥분하곤 했다. 대학생일 때는 러시아와 프랑스 고전문학을 읽었다. 지금은 일본과 중국 작가들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문학에 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5년 전 한국에 왔을 때는 단 한 명의 한국 작가 이름도 알지 못했고 한국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었다.

여기에는 중요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영국인들이 ‘3%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매년 영국에서 출판된 책들 중 오직 3%만이 외국책을 번역한 것이다. 우리가 다른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 중 하나가 번역 문학임을 생각하면 이는 비극이다. 유럽의 이웃 국가들은 번역 소설만 놓고 말하면 훨씬 더 상황이 낫다. 프랑스에서 출판된 책들 중 27%, 스페인에서 출판된 책들 중 28%가 번역된 책이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번역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책을 많이 읽는 영국인들이 한국문학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문학 자체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친구이자 한국문학 전문가인 찰스 몽고메리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교수는 최근 “번역 문학이 문화의 창이라면, 한국문학은 벽돌로 만들어진 방, 방공호 또는 이글루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몽고메리는 한국문학이 다양한 ‘한류’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옳다. 세계의 영화광들은 아마도 두세 명 정도의 한국 영화감독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전세계 음악팬들도 몇몇 한국 가수의 이름은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더라도 한국 작가는 한 명도 모를 수 있다.

한국문학 번역가인 브라더 앤서니는 그 이유가 한국의 역사와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최근의 한국사는 한국문학에 강한 영향력 같은 것을 행사한다. 역사를 잘 알지 못하면 문학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자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의 역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극뿐 아니라 믿기 어려운 성과도 가득해 대단히 흥미롭고 독특하다. 한국문학을 읽음으로써 이런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내 삶의 즐거움 중 하나다.

사실 나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 한국 소설과 처음 만났다.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다가 특이한 제목, 낯선 표지 그림과 마주쳤는데 그것은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였다. 책을 읽자마자 서울의 초현실적 묘사에 몰두해 넋을 뺏겼다. 주변 사람들을 만나서도 그 이야기를 했다. 소설의 상상은 번화한 이 도시의 현실과 뒤섞였다. 또 내 경험은 풍부해지고 기묘해졌으며 더 좋은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 작가들을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서울북앤컬처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김영하, 신경숙, 황석영, 공지영 등 작가들을 초대해 그들의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소설과 경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문학번역원과 도서출판 아시아 같은 단체들의 도움으로 한국문학의 풍부한 역사를 기리는 행사를 주최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내 삶은 한국문학을 통해 더욱 충만해졌다. 한국이 내 영혼과 마음으로 들어왔다.

배리 웰시 숙명여대 객원교수ㆍ서울북앤컬처클럽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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