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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김치녀 장독대 탈출기 ①

입력
2015.08.07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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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진짜로 김치가 되어버린 김치녀 이야기 입니다. 온라인상의 여성혐오를 둘러싸고 터져 나온 갈등을, 우화의 형식을 빌려 2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어느 날 아침 썸머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장독 속에서 한 포기의 뻘건 김치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전날 저녁, 썸머는 여느 때처럼 불을 끄고 자신의 방에서 잠이 들었지만, 그녀가 지금 깨어난 곳은 뒷마당 장독 안이었다.

‘덜그럭,덜그럭’
‘덜그럭,덜그럭’

“저기, 니가 나 밟고 있거든? 좀 비켜줄래?”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썸머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의 발밑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다른 김치였다. 썸머는 놀라서 그녀의 얼굴에서 발을 치웠다. 썸머는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김치녀1은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난 어제까지만 해도 내 방에서 자고 있는데 내가 왜 김치가 된 거야? 넌 왜 여기 있는 건데?”

김치녀는 말했다.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지.”

“무슨 염치?”

“잘 생각해 봐. 넌 여자라고 부당한 권리를 누렸어. 정말 꼴불견이지. ”

썸머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당한 권리를 누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런 적이 없어.”

썸머는 생각했다. ‘어째서 내가 김치녀란 말인가.’ 그녀는 김치가 되기 전 날, 자신의 하루를 복기했다.

● 김치가 되기 전 날

오전엔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갔고, 오후엔 1차 서류합격이 된 회사에서 면접을 봤다. 면접관 1은 그녀의 서류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나는 여직원 별로 안 뽑고 싶은데, 여자가 많네”(▶ 관련기사 보기)

면접관 2는 그녀를 보며 “외모 관리는 안 하느냐”, “자기관리가 부족한 것 같다”며 혀를 찼다.

그녀는 기분이 나빴지만 까탈스러운 여자애로 찍히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웃었다. 어차피 면접관 대부분은 여성 지원자의 외모를 평가한다고 하니까 그녀만의 일도 아니었다. 아시아경제의 조사에 따르면, 기업 인사담당자 880명에게 "채용 시 지원자의 외모를 평가하느냐"고 묻자 63.8%가 "그렇다"고 답했다. 외모를 보는 이유로는 '대인관계가 원만할 것 같아서'(35.3%, 복수응답)가 가장 많았다. 경력(8.4%)보다는 신입(37.4%) 채용을 할 때, 남성(6.2%)보다는 여성(40.3%) 지원자의 외모를 더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시, 여직원은 회사의 ‘꽃’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 관련기사 보기)

면접이 끝나고 선배 언니를 만나 커피를 마셨다. 언니는 2년째 방송국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정규직 전환은 안될 것 같다고 했다. 언니는 남자친구랑 데이트 비용 문제로 싸움이 잦다며 하소연을 했다. 언니는 2년 먼저 취직을 했고, 이번에 언니의 남자친구는 중소기업 정규직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최종 면접만 남겨두고 있다고 했다. 한국은 OECD가 남녀의 임금 격차 통계를 조사한 2000년부터 2012년까지 13년 동안 13번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성별, 고용형태별 임금 차별이 심하고, 노동조건이 열악한 ‘여성 비정규직’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취직 했으니까, 데이트 비용은 거의 내가 내지. 그런데 이번에 걔 취직 되면 신입인데도 나보다 세 배 더 벌더라. 그러면 이제 좀 나아지겠지. 자격지심 때문에 싸울 일도 없을 거고.”

한국은 남성 정규직 임금이 여성 비정규직의 3배가량 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자료를 보면, 2014년 3월 기준으로 전체 비정규직(822만9000명)의 53.8%인 442만8000명이 여성이다. 임금 격차는 남성 정규직 임금(327만원)을 100으로 봤을 때 남성 비정규직(174만원)은 53.4, 여성 정규직(218만원)은 66.8, 여성 비정규직(116만원)은 35.4로 조사됐다. 언니는 커피를 마시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결혼을 하면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언니는 말했다. 회사 눈치가 그랬다.

언니 얘기를 들으니 속이 답답했다. ‘회사에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들어가서도 마찬가지구나...’ 그녀는 언니와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옆 자리에선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들 한 무리가 ‘여자는 역시 처녀가 좋다’며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언니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그래.”

맥주집 화장실은 허름하고 변기도 더러웠다. ‘화장실 몰카가 극성이라던데’ 그녀는 인터넷에서 본 뉴스가 떠올라 주변을 살폈다. 나사구멍에도 몰래카메라가 있다고 하니, 그녀는 괜히 불안한 마음에 화장실에서 손만 씻고 자리를 떴다.

집에 돌아와선 홈쇼핑을 보면서 야식을 먹었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다 잠이 들었다. 그게 다였다.

● 다시 장독 안에서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왜 김치가 된 건지?”

“아니.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는데.”

김치녀1은 코웃음을 치며 썸머를 노려봤다.

“너 한 달에 116만원 버는 주제에 스타벅스 갔더라?”

썸머는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만난 언니와 간 곳이 스타벅스였다.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버스에서 다른 사람들이 앉기 불편하게 네가 바깥쪽에 앉아 있었지. 이 김치녀야.”

“뭐?”

김치녀1은 그녀가 찍힌 사진을 보여주었다. 김치녀를 욕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버스 바깥쪽에 앉아있는 그녀의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댓글에서 그녀를 ‘이기적인 김치녀’라고 욕했다. (▶ 관련기사 보기) 익명의 공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찍힌 사진이 나돌고 있었다니. 충격에 손이 떨렸다.

“게다가 밤에 홈쇼핑으로 샤넬, 에르메스백 파는 거 보고 침을 흘렸지. 그러다가 결국 샤넬 립스틱 질렀지? 그런데도 김치녀가 아니야? 게다가 너랑 만난 그 언니는 데이트 비용을 남자가 내길 바라고 있지.”

썸머는 온몸이 김칫국물로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 립스틱이 그녀에게 사치였을 순 있다. 하지만 그녀가 번 돈으로 정당하게 값을 지불하고 산 물건이었다. 그게 왜 잘못이란 말인가? 그녀는 김치녀1의 말대로 자신의 잘못을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이 잘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오전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느 친구들과 다를 게 없었다. 오후엔 면접을 갔다. 외모로 평가 받으면서도, ‘여직원은 회사의 꽃’이라는 모욕적인 말도 웃으면서 넘겼다. 데이트 비용을 남자가 내길 바라는 그 언니를 누가 얼마나 안다고 ‘김치녀’란 틀에 가둔단 말인가. 그녀는 이전까진 ‘김치녀’란 일부의 못된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차별의 말이, 얼마나 편협하고 자의적인 잣대로 생겨난 말인지 자신이 김치가 되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김치녀1이 말하는 ‘염치없다’거나 ‘여자라서 부당한 권리를 누린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일상 군데군데 조각난 유리 파편이 박혀있었다. 그녀가 겪는 구조적 차별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일상적이라고 해서, 그리고 다들 적응하고 있다고 해서 그게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자신의 힘들었던 하루 속에서 굳이 굳이 ‘김치녀스러운’ 점을 찾아내어 그 순간을 확대 포착한다는 게 억울했다. 그녀가 흘리고 있는 것은 분노의 김칫국물이었다.

그녀는 김치녀1을 보고 말했다.

“그러는 너는 왜 김치가 된 건데?”

김치녀1은 답했다.

“나... 난 그래도 개념 있는 김치녀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 난 생리결석계도 함부로 쓰고 키 큰 남자를 좋아한다고 동네방네 얘기하고 다녔거든. 그리고 부자면 좋겠다고도 얘기했어. 남자의 물적 조건을 따진 거지. 속물처럼. 게다가 난 운전도 못해. 차를 끌고 나가면 여자 망신을 다 시키지.”

김치녀1은 왜인지 자신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들을 읊으면서도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자신은 김치녀로서의 숙성을 거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뭐지, 저게... 바보인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개념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 받을 일과 개념 없는 ‘여자’라고 비난 받을 일을 그녀가 잘못 구분하고 있다고.

“차를 끌고 나가서 사고가 날 거 같으면 조심을 해야지. 그건 ‘여자’ 망신을 시킨 게 아니야. 그냥 니가 운전을 못한 거지.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는 각자 다른 잘못에 대해 ‘김치녀’라는 같은 잣대로 이 장독에 갇힌 거야. 남이 널 욕한다고 해서 그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말하고, 아니라고 따져. 내가 버스에서 바깥쪽에 앉아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했다면 난 그 자리에서 ‘안쪽에 앉아달라’는 말을 들었어야 해. 김치녀라고 조롱하면서 나를 몰래 찍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은 나한테 ‘말’을 했어야 한다고.”

김치녀1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썸머는 화가 가라앉지 않아 숨을 몰아쉬었다. 썸머는 김치녀1의 핸드폰을 뺏어 김치녀를 조롱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신고를 눌렀다. 핸드폰에 김칫국물이 차박차박 떨어졌다.

그 때였다. 장독 뚜껑이 달그락거렸다. 김치녀1은 겁에 질렸다.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김치녀는 다 격리시켜 버려야 해.... 김치녀는 다 격리시켜 버려야 해....설치고 말하고 떠드는 김치는 장독에 다 묻어야 해...”

‘김치녀...김치녀...아이 헤이트 김치...’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말을 반복했다. 새로운 김치를 묻으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뚜껑을 여는 새를 틈타 장독을 탈출했다.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철퍼덕 땅바닥에 엎어졌다. 김칫국물이 땅에 새나왔다. 그는 삽을 들고 있었다.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너... 김치... 왜 나왔지....?”

그는 나를 노려보며 장갑을 꼈다. 나는 두려움에 숨이 턱 막혔다.

※ 다음 편(8월 14일)에 이어집니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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