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톡2030] 집으로 휴가 떠나는 사람들

관습적인 여행 대신 익숙·안락한 곳 찾는 젊은이 늘어

20대 70% "조용한 휴가 원해"

과시용 여행 아닌 자기만족 추구… 작곡 등 취미활동하며 시간 보내

이번 여름 번잡한 휴양지에서 인파에 시달리느니 집에서 휴가를 보내는 '스테이케이션'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집에 있다고 지루할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변호사 이민욱(가명ㆍ37)씨에게 여름 휴가는 가족에 대한 봉사일 뿐이다. 그는 지난달 27일 장인, 장모를 포함해 가족들과 제주도로 바캉스를 떠났다. 어르신과 세 살배기 딸을 생각해 동남아나 유럽 대신 가까운 곳으로 휴가지를 정했다. 그러나 그는 휴가 사흘 내내 가족들 ‘수발’을 드느라 만신창이가 됐다. “여행 말고 집에서 잠이나 실컷 자고, 평소 보고 싶었던 책을 읽고 싶었다”는 그였지만 가족들 등살에 어림도 없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과장 진모(39)씨도 3일부터 사흘간 강원 정선군에 있는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부인과 겨우 맞춘 일정이지만 “썩 기다려지는 건 아니다”는 게 그의 속마음. 진씨 역시 어린 자녀를 돌볼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왔다. 진씨는 “집에서 라면이나 먹고 뒹구는 게 최고의 휴식이라 생각하지만 꿈 같은 얘기”라고 말했다.

바캉스(Vacance). 소리 내어 읽기만 해도 우리네 마음을 ‘심쿵’(심장이 쿵쾅거리다)하게 만든다. 휴가를 의미하는 이 세 음절의 단어는‘면제, 해제, 해방’의 뜻을 가진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했다. 일상 속 삶의 무게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시기다. 때문에 바캉스가 발달한 유럽을 비롯해 국내에서는 이 기간에 국내외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휴가의 정석처럼 굳어져 왔다.

그런데 휴가라고 했을 때 머릿속에 ‘바가지 요금’이나 ‘북적거리는 인파’가 먼저 생각나는 사람에게 휴가철 여행은 해방이 아니라 고역이다. 특별한 곳을 찾아 떠나기 보다 집이나 편안한 장소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홈캉스(Home+Vacance)’족이 늘고 있는 까닭은 그래서다. ‘방콕’(방에 콕 쳐 박혀 있다)의 세련된 표현쯤 되는 홈캉스는 집에 머물며(Stay) 휴가(Vacation)를 보낸다고 해서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이라고도 불린다.

최근 시장조사 전문기업인 마크로밀엠브레인의 트렌드모니터가 19~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휴가 때 꼭 여행을 가지 않아도 좋다”는 사람이 절반 이상(51.7%)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지난해 같은 조사 때(48.5%) 보다 더 확대된 것이다. 여행을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성수기 인파와 바가지 요금 등 문제로 기분 좋은 여행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78.9%ㆍ중복응답)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20대는 10명 중 7명 꼴로 “조용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 소셜커머스 위메프가 휴가철을 맞아 20~50대 남녀 1,000명에게 물었을 때도 휴가의 주된 목적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46.1%)로 파악됐는데, 이를 위해 직장인들은 선호하는 휴가지역에 대해 바다와 강에 이어 세 번째로 ‘우리 집’을 꼽기도 했다.

스테이케이션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흔한 사례는 집에서 밀린 드라마나 영화를 몰아서 보며 ‘잉여롭게’쉬는 식이다. 회사원 박지호(31)씨는 지난달 27일부터 닷새 동안 집에만 있었다. 그는 “직장생활이 4년 차로 접어들다 보니 만성피로와 수면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해서 번잡한 곳에 가기 보다 집에 남아 푹 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보고 싶었던 미국 판타지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즌 1~4를 컴퓨터에 다운로드 받아 ‘정주행’(시리즈 물을 1편부터 마지막 편까지 모두 보는 것)했다. 여유가 없으면 읽기 어려운 두꺼운 인문서적도 세 권이나 샀다. 박씨는 새벽 3시까지 책과 드라마를 보다 다음날 점심 때가 돼서야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는 “편의점에 라면을 사러 갈 때 말고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아 ‘폐인’처럼 지냈다”면서도 “모처럼 제대로 쉬었다”며 만족했다.

그림이나 음악 등 취미활동에 전념하는 경우도 있다. 고등학교 교사 백해인(27ㆍ여)씨는 평소 가고 싶었던 그리스 산토리니 섬을 여행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서 즐겼다. 백씨는 지난주 초 서점에서 ‘명화 그리기 세트’를 샀다. 명화 그리기 세트는 유명 작가의 그림이나 풍경화가 밑그림이 그려져 있고 붓, 유화물감 등 도구도 한 데 있어 사용자는 순서에 맞춰 그리기만 하면 된다.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아 방법을 모르는 젊은 층에게서 최근 인기다. 백씨는 지난 한주간 집에서 그림을 완성하며 휴가를 만끽했다. 백씨는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여름에는 집에서 놀 거리를 찾는 편”이라며 “붓을 놀리는 3~4시간 동안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할 수 있어 유익했다”고 말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대학생 김은주(26ㆍ여)씨는 지난주부터 서울 논현동에 있는 작곡 스튜디오에 출근도장을 찍고 있다. 그는 악기를 다루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루 3~5시간을 투자하며 힙합 곡을 만들고 있다. 김씨는 “관광지에서 사람에 치이느니 조용한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멜로디를 만드는 게 더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거창하게 작곡 스튜디오에 나오지 않더라도 집에서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등을 활용해 나만의 곡을 만들 수 있는 길은 무궁무진하다”고 설명했다.

원희선(30ㆍ여)씨는 휴가 때마다 으레 해외로 나가는 일에 피로를 느껴 올해부터는 실내에서 조용히 휴가를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원씨는 지난 주말 회사 동료들과 함께 집에서 조촐한 ‘포트락 파티’를 열었다. 포트락 파티는 지인들을 초대해 파스타, 샐러드 등 음식을 가져와 나눠 먹는 미국식 가정파티를 말한다. 원씨는 “파티를 위해 집을 꾸미거나 계획을 세우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며 “친한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작은 영화 상영회를 열어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원씨는 내년 여름에는 모르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포트락 파티도 도전할 계획이다.

청춘들의 자발적 방콕 현상은 획일적인 집단주의 문화에서 탈피하자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주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게재하는 ‘자랑질’ 사진을 보며 자신의 행복을 재단하기 보다 ‘나는 나’라는 자기추구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2030세대를 중심으로 경직된 문화와 불편한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에서 안락함을 추구하는 코쿤(Cocoonㆍ누에고치)족의 증가는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며 “휴가뿐만 아니라 주말, 퇴근 후 자유시간에도 광범위하게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재진기자 blanc@hankookilbo.com

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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