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더하기 씀] ① 만들고 해체하고... 사진이 거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 오늘부터 이직 기자의 ‘봄 더하기 씀’을 연재합니다. 그는 수요일마다 본보에 실리는 ‘View &’ 지면을 만드는 편집쟁이입니다. 매주 들여다보는 사진으로부터 그는 어떤 목소리를 듣는 걸까요? 신문 지면에서 다 풀어내지 못한 이미지들의 사연을 여기에 싣습니다.

● 프롤로그

사진은 말이 없다. 그러나 사각 틀 안에 담긴 이미지들을 바라보노라면 그들이 무언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순간 사진을 통해 이미지들의 외양 뿐 아니라 ‘소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견고한 프레임이 강요한 침묵 속에서 그 소리를 끄집어내고픈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사진에서 ‘본(봄)’ 소리들을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미지들이 건넨 내밀한 메시지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정리해보면 뭔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이런 의문이 그동안 내 머릿속을 사로잡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써(씀)’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시작하게 된 연유다.

● 거울-이미지, 만들고 해체하는

우리는 매일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그렇다면 거울에 비친 나는 정말 현실 속 나일까? 반사에 의해 맺힌 상(像)을 되쏘는 거울은 사물의 위치를 좌우로 바꾸어 놓는다. 더욱이 거울은 현실의 맥락에서 내 모습을 떼어내어 자신의 틀 안에 재배치시키는 요술을 부린다. 그것만으로도 거울에 비친 ‘나’와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는 같은 모습이 아닐 것이다. 거울은 또한 역설의 도구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수많은 ‘차이’들을 생성한다. 낯익은 세계 한 가운데를 비추면 거울 속 풍경이 문득 낯설어 보인다. 사진이 거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위 사진 속 거울을 보라. 그곳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SF영화 <인셉션>에 등장하는 여러 겹의 꿈도, 사실은 거울-이미지를 서사 속에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진에는 여러 개의 ‘틀’이 들어있다. 사진을 찍는 카메라의 틀, 사진 속에 있는 거울의 틀, 그리고 거울을 품은 카메라의 틀을 다시 품고 있는 사진의 틀. 거기에 또 하나, 그 사진을 응시하고 있는 나의 시선에 내장되어 있는 의식의 틀까지 더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과 더불어 나의 의식에 담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의 시선 역시 또 하나의 틀에 포함되지 않을까? 사진 속에 담긴 거울은 그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우주 속에 포개지고 겹쳐져 있는 무한한 틀들을 감지하도록 만든다.

또한 이 사진은 거울을 통해 우리가 서로 다른 복수의 시간대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거울 바깥에 담긴 풍경은 해질녘의 모습을 담고 있다. 고가도로의 검은 그림자 사이로 뉘엿뉘엿 비치는 붉은 하늘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왠지 모를 서글픔을 안겨준다. 그런데 그 풍경의 한쪽을 한낮의 푸른 하늘을 담고 있는 거울-이미지가 침입하고 있다. 거울을 통해 사진은 두 개의 시선, 두 개의 시간대를 함께 보여준다. 서쪽과 동쪽의 거리 못지않게 이질적인 것은 두 개의 하늘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느낌이다. 거울은 너무나 간단하게 그 차이를 하나의 이미지로 바꿔버린다.

이것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백미러를 찍은 사진이다. 거울의 바깥에 보이는 것은 지금 막 빠른 속도로 지나치고 있는 찰나, 즉 현재의 풍경이다. 반면 거울 안에는 방금 스쳐 지나온 직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런 방식으로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울을 찍은 사진은, 두 개의 다른 속도를 재현하고 있다. 뒤에 남겨진, 머물러 있는 것들이 쏜살같이 지나치는 현재의 시간 속에 포개진다. 그 결과 사진은 시간과 속도, 그리고 공간에 관한 우리의 관성적인 감각을 비틀면서 확장시키고 있다.

사진에서는 이렇게 중첩되는 심상을 이용해 인식의 혼동을 일으키는 효과를 가리키기 위해 ‘미장아빔(Mise-en-Abyme)’이라는 용어를 쓴다. ‘심연 속에 놓다’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서로 마주 선 거울이 서로의 상을 주고받듯, 틀 안에 있는 이미지가 또 다른 틀을 통해 자신을 되비추는 것을 말한다. 사진이나 영화에서 이 기법은 시점을 중층적으로 쌓아올리거나 분산시키려고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이를 잘만 활용하면 평면적인 사진이 지닌 2차원적 한계를 뛰어넘어 3차원 또는 그 이상의 가상공간을 구축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들여다 볼 때처럼 사진과 거울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이 변화무쌍한 공간을 보면, 나는 끝 모를 황홀감에 빠져든다. 유한한 지면 속에 풍성한 볼거리와 의미를 만들어내고 싶은 편집기자들에게, 거울-이미지는 그야말로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거울은 신선한 영감을 제공하는 ‘요물’같은 존재다.

두 장의 사진 속에 있는 거울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자.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마저 반사해 되돌려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 사진들은 ‘내가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그 안에 찍혀 있는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보고 있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마침내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또 다른 시선에 의해 포착된 거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쯤 되면, 나는 이 사진들에서 눈을 돌려야만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몽상은 매혹적인 것임에 틀림없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하는 ‘기자’인 것이다.

거울-이미지가 만들어낸 인식의 미로를 헤매다 제자리에 오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도 이렇게 달리 보이니 신기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생각 없이 달리는 일상에 제동을 걸고 싶을 때 나는 이렇게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 안의 이미지들이 나에게 무언가 새로운 질문을 건네기를 바라며….

jklee@hankookilbo.com

한국일보 5월 20일자 15면 View &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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