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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유서

입력
2015.07.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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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크 밴드 ‘너바나’의 리드 싱어 커트 코베인은 1994년 27세에 자살했다. 유서는 음악적 열정이 식어가는 데 대한 좌절과 혐오를 토로하고, ‘사라지기보다 타버리는 게 낫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닐 영의 노래 ‘헤이 헤이, 마이 마이(Hey Hey, My My)’의 한 소절이었다. 충격을 받은 닐 영은 그 해 앨범 ‘천사와의 잠(Sleeps with Angels)’를 코베인에게 헌정했고, 이후 ‘헤이 헤이, 마이 마이’를 부를 때는 ‘한번 가면 다신 못 와’라는 다른 소절을 강조했다.

▦ 지난해 12월28일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의 트랜스젠더 소녀 릴라 알콘(17)이 달리는 트럭에 뛰어들었다. 유서는 짧은 삶이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웠는가로 가득했다. ‘난 이미 충분히 슬펐고, 더 이상 내 삶을 망칠 수 없습니다. …트랜스젠더가 나와 같은 취급을 받지 않고 감정과 존엄을 가진 인간으로서 존중 받는 날이 와야 비로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그의 호소는 성 소수자의 성적 지향을 바꾸려는 ‘개조 치료’ 중단 운동에 불을 붙였다. 오바마 대통령도 올 4월 전면 중단을 촉구했다.

▦ 유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글의 힘, 문장의 힘이라기보다 죽음의 힘, 죽음 앞에 경건한 마음가짐에서 비롯한 힘이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모두 유서를 남기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픈 두 건의 자살 모두 유서가 없었다. 어렴풋하게 죽음을 선택하기까지의 심사를 더듬을 수야 있지만, 끝내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스스로의 존재를 세상에서 말끔히 지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백지 유서’로 여기고 그 뜻을 존중하려고 애쓰지만 잘 안 된다.

▦ 죽음을 앞둔 심경을 담았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유서를 보는 세상의 눈길은 그때마다 다르다. 유서가 아닌데도 ‘유서 대우’를 받아온 ‘성완종 리스트’와 달리, 일부가 공개된 국정원 직원 임모씨의 유서는 엉뚱하게 의문의 표적처럼 되고 있다. 국정원에 대한 뿌리깊은 거부감을 이해해도, ‘감사합니다’는 표현을 들어 국정원의 체질을 물고 늘어지기까지 하는 것은 볼썽사납다.‘고맙다’나 ‘사랑한다’로 끝맺은 유서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고 보면 유서의 힘은 죽음의 힘이 아니라 산 사람들의 해석의 힘이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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