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정신 이념ㆍ세대 아우르는 가치

국민중심, 권력분립 열망 오롯이 담아

'한 사람 지배하는 곳'은 공화국 아냐

예순 일곱 번째 제헌절이다. 광복 70년에 맞이하는 제헌절의 감회가 남다르다. 광복 직후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 나라 세우기였다면, 그 방향과 내용을 규정한 게 제헌헌법이었기 때문이다. 헌법 정신은 이념·계층·세대를 아우르는 나라의 중심 가치다. 정권은 흥망성쇠해도 중심 가치가 흔들려선 안 된다.

광복 70년 동안 헌법은 여러 차례 개정됐다. 변하지 않았던 것의 하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제1조 제1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제2항은 유신헌법에 의해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고 부분적으로 개정됐지만, 원래의 내용으로 되돌아갔다. 헌법 제1조에 담긴 민주공화국의 천명과 국민주권의 선언은 광복 70년을 이끌어온 마스터 프레임이다.

헌법 제1조의 성립사를 연구한 역사학자 박찬승은 ‘공화국’에 ‘민주’라는 말이 결합된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한다. 하나가 귀족 주도의 ‘귀족공화제’에 대비되는 평민 중심의 ‘민주공화제’를 부각시켰던 임시정부로부터의 전통이라면, 다른 하나는 권력 집중을 강조하는 ‘인민공화국’에 맞서 권력 분립을 중시하는 ‘민주공화국’을 선호했던 광복 직후 이념적 상황으로부터의 영향이다. 이렇듯 ‘민주공화국’은 국민 중심과 권력 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열망을 오롯이 안고 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민주공화국에서 ‘공화국’의 의미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헌법이 제정된 당시 공화국이라는 말에 ‘비(非)군주국’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치판단의 관점에서 공화국을 지탱하는 이념인 공화주의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은 현재적 상황을 지켜볼 때 매우 중대한 과제다.

공화주의는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되고 수정돼 왔다. 전통적으로 공화주의는 덕성을 갖춘, 공공성에 헌신하는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사회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또 공화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과 경쟁하고 이를 비판해 왔다. 자유주의가 타자의 간섭으로부터의 ‘소극적 자유’를 중시한다면, 공화주의는 스스로를 지배할 때 진정 자유로운 ‘적극적 자유’와 사회 구성원으로 동동한 권리를 누리는 ‘비지배적 자유’를 강조한다.

공화국(republic)이란 말의 기원을 이룬 라틴어인 레스 퍼블리카(res publica)는 그리스어인 폴리스(polis)에서 유래됐다. 비극시인 소포클레스가 노래했듯, ‘한 사람이 지배하는 곳은 폴리스가 아니다’. 철학자 키케로가 주장했듯, 공동의 법과 이익에 의해 결속된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레스 퍼블리카, 다시 말해 공화국이다. 공화국의 이상은 한 개인이나 소수가 아닌 시민 모두가 주인이 되는 나라 만들기에 있다.

이쯤 해서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첫째,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는 누구인가. 대통령인가, 엘리트인가, 기업가인가, 아니면 국민인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둘째, 적극적 자유와 비지배적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선 경제적 평등이 요구되지 않는가. 경제적 불평등이 강화된다면, 그것은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화국의 위기’를 가져오지 않는가. 셋째, 우리 국민들은 시민적 덕성ㆍ참여ㆍ신뢰의 윤리를 내면화하고 있는가. 사회를 ‘만인 대 만인의 투쟁’ 공간으로 생각하고 공적 가치보다 사적 이익을 우선시해오고 있지는 않은가.

공화주의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더 나은 사회를 일궈가기 위해선 자유주의도 필요하고, 공동체주의도 중요하며, 공화주의도 요구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해 달려온 광복 70년의 역사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하지만 '‘신뢰의 상실’과 ‘보이지 않는 정부’가 어두운 시대를 가져올 수 있다’는 아렌트의 경구만큼 현재 대한민국이 서 있는 위태로운 자리를 생생히 보여주는 말은 없다. 대통령이든 국민이든, 보수든 진보든, 젊은 친구든 어르신이든, 광복 70년의 제헌절을 맞이해 헌법 제1조에 담긴 정신을 한번쯤 되새겨보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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