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오늘은 내가 '김밥 전선생'

입력
2015.07.15 10:37
0 0

‘도라지와 당근을 6x1x0.1㎝ 크기로 2개씩 만들고 쪽파는 파란쪽 2㎝, 흰쪽 4㎝ 등 총 6㎝를 자르시오. 고기는 2㎝ 더 길게 잘라 얇게 두드리시오.’

지짐누름적 레시피의 일부다.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비단 이 뿐만 아니라 요리학원의 모든 음식에는 썰고, 두들기고, 데치고, 두르고, 볶고, 익히고, 꽂고, 얹는 다양한 요리법이 정형화되어 있다. 종강 한 달 반쯤 지난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음식도 상당수여서 세부적인 레시피는 책을 들춰봐야 알 지경이다.

가끔 이런 의문이 든다. ‘제대로 해먹지도 않을 음식 조리법을 왜 배웠을까.’ ‘아예 김치찌개, 된장찌개처럼 평소 자주 해먹는 음식만 배웠으면 좋지 않을까.’ 최근 여행을 함께 다녀온 퇴직 공무원은 ‘집밥 백선생’의 레시피가 가장 피부에 와닿는다며 신봉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한식조리사자격증 과정이 무용지물에 가깝다고도 했다.

무와 당근, 달걀 등을 규격에 맞게 칼로 써는데 지쳐버린 나도 그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100시간 동안 익힌 쉰 한 가지 요리가 쓸모없을 리는 만무하다. 일상생활에서 사장될 가능성이 높은 음식도 많지만 두루두루 요리의 기본기는 갖추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동안 음식을 기름에 튀기기도 하고, 석쇠에 구워보기도 했으며 밀가루로 칼국수 면발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아마 김치찌개류에 만족했다면 평생 접해보지 않았을 요리법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최소한 요리가 두렵지는 않다. 시중에 나도는 수많은 요리책, TV를 도배한 쿡방, 모바일 요리앱 등에서 선보이는 수많은 요리가 딴나라 얘기였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실제로 요리를 잘할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지만 자신감 하나는 충만하다. 정 급하면 요리강사에게 SOS라도 치면 될 일이다.

이 자신감은 바로 레시피 해독에서 나오는 것 같다. 옛날에는 조리법을 백 날 쳐다보고 있어도 상형문자로만 여겨졌다. 고춧가루 한 큰 술, 간장 한 컵이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숟가락과 컵의 크기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리의 세계에는 200cc, 15cc, 5cc 등으로 규격화된 계량컵과 스푼이 있다.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때다. 한 고비 넘기고 다음 길이 생각나지 않을 때면 처음 먹었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학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어머니 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음식, 온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상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그 요리의 선봉에는 온 국민의 주식 겸 간식인 김밥이 있다. 오십 평생을 어머니, 아내, 이웃, 김밥집 아주머니가 만들어준 김밥을 내 손으로 이제야 만드는 것이다.

마음의 준비는 끝났지만 현실적인 장애물은 있기 마련이다. 어릴 적 소풍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김밥 요리를 예고했더니 반응이 신통치않다. 집 안의 여성동지들이 모두 체중감량을 핑계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날마다 저울 달아보고 눈금 하나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는데, 김밥은 가장 유혹적이면서도 거부해야만 하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나 혼자 김밥 우물거리지 않으려면 그들의 고민 아닌 고민을 해결해줘야 했다. 생각 끝에 백미를 현미로 대체했다.

김밥은 하얀 쌀밥에 싸는 것이 제 격인데, 거무틱틱한 현미로 제 맛이 나올지는 의문이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장에 들러 김밥용 김과 달걀, 햄, 맛살, 당근, 단무지, 깻잎, 오이, 우엉, 청양고추, 깨소금까지 준비를 모두 마쳤다. 달걀은 황백 분리하려다 흰자 노른자 한꺼번에 지단으로 만들었다. 햄과 당근도 프라이팬에 익혔다. 현미밥에 깨소금과 참기름을 넣어 조물조물하다 손가락 데일 뻔했다. 뜨거운 밥알이 손에 달라붙어 입으로 뜯어먹느라 혼났다. 자 이제 말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김발 위에 김과 깻잎을 얹고 밥알을 까는 것이 여간 난제가 아니었다. 밥주걱으로 현미를 김 위에 얇게 까는 것부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빈 틈 없이 꼼꼼히 밥알로 메운 후 깻잎 두 장을 깔고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김을 말려고 했더니 뭔가 허전했다. 김치가 빠진 것이다. 후다닥 손가락으로 김치를 길게 찢어서 올리고 김밥을 마는 것으로 오늘의 요리를 완성했다.

조리사과정 비공인 요리 1호였다. 옆에서 TV 채널을 돌리던 아내가 슬그머니 다가와 김밥을 썰기도 전에 한 입 먹어본다. 다이어트 한다더니 잘만 먹는다. 큰딸은 김밥을 보자마자 “나 저녁 안먹어요”라며 선수를 친다. “맘대로 해라”며 모른척하고 우물우물 먹고 있으니 언제 왔는지 옆에 서서 한입 먹고 있다. “맛있다”는 찬사가 미끼인 줄도 모르고 나는 웃고 있다.

jhjun@hankookilbo.com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직접 제보하실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며, 진실한 취재로 보답하겠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