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이 던진 보수개혁은 시대정신

노무현 가치처럼 다신 되돌릴 수 없어

임기 반환점서 정치초심 돌아볼 필요

지난 8일,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가 사퇴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국회 정론간에 들어오고 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에 대한 대중의 고평가는 당장은 믿을 게 못 된다. 대중이란 원래 새털처럼 가볍고, 갑작스런 열광은 지속성이 없으므로. 앞으로 반동(反動)과 조정의 긴 시간을 거쳐야 비로소 유승민의 진짜 자산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승민의 정치적 미래와 상관없이 그래도 그는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굉장한 일을 저질렀다. 한국정치사에서 되돌아 올 수 없는 또 하나의 다리를 놓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수가 가야 할 명확한 방향 제시가 그것이다. 시간이 지나 더 이상 뉴스가 아닌 유승민의 퇴임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다.

그 대단한 의미를 알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면 된다. 지금은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최상위를 다투지만 재임 시 그는 최악이었다. 불통, 완고함, 분노, 편가르기, 대결, 갈등, … 박근혜 정권을 떠올릴 테지만, 사실은 노무현 때 처음 일상화한 정치용어들이다. 화해 소통의 리더십을 요구하던 여론도 같았다.

그러니 집권 후반기 지지도는 줄곧 10~20%대였다. 이걸 당시 보수언론에만 핑계 돌리는 건 기억상실이다. 진보진영의 비판은 더 표독스러웠고, 노무현 때문에 진보의 미래가 사라졌다는 원망이 들끓었다. 그러므로 사후 그에 대한 지지는 대통령이 아닌, 소박하고 솔직한 ‘인간 노무현’에 대한 정서적 복권에 가깝다.

노무현은 그러나 당대엔 실패했어도 역사적으로는 엄청난 역할을 해냈다. 권위주의와 기득권 타파, 정경유착 고리 끊기, 인권존중과 약자에 대한 배려, 반칙 없는 정치 지향, 탈지역주의, 소통 강조(이건 본인이 가장 크게 실패했음에도) 등…, 비록 실현할 역량이나 실적은 없었어도 그가 던진 이들 가치는 그대로 시대정신이 됐다. 이후 누가, 어떤 세력이 집권하든 이를 절대로 비켜갈 수는 없게 됐다.

노무현에 대한 반동정서에 힘입어 집권한 이명박 정권이 실패한 이유도 다름 아니다. 노무현을 현실에선 지웠으나, 그가 제시한 가치가 이미 국민에게 체화(體化)돼가고 있음을 몰랐던 때문이었다. 부패한 기득권의 재활보, 정경유착의 부활, 낡은 성장담론 재활용 등은 이전 같으면 웬만한 정도는 그러려니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단, 노무현 시대를 거치지 않았다면.

박근혜 정권도 국민이 보기에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지금 초라한 지지도는 애타게 실현을 기다리는 10년 전 시대적 화두가 한치 진전 없이 또 외면되고 있는데 대한 실망과 허탈감의 반영이다. 무엇보다 강력한 권위주의나 정치적 불통 등은 훨씬 이전으로 거스르는 시대착오적 퇴행이다. 더욱이 노무현 염증의 가장 큰 병인이었던 무능의 추억까지 되살려진 터에야.

유승민이 던진 가치가 딱 그렇다. 복지ㆍ세금담론, 성장의 가치와 방법론, 현 시장경제 비판, 진영을 넘은 합의의 정치 등은 이전 보수라면 공개적으로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용어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당당한 집권당 원내대표 자격으로 국민을 향해 입을 연 순간, 이 또한 시대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지향가치가 됐다.

궁극적으로 ‘정의롭고 공정하며 따뜻한 보수’는 앞으론 어떤 보수정치인도 외면하긴 어렵다. 보수가 진보의 전유 가치를 일정부분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는 점에서, 크게 보면 노무현이 깔아 놓은 다리를 연장하는 착실한 진전이다. 중단이나 퇴행 없이 옳은 가치를 계속 쌓아가는 것, 이게 정상적이고도 바람직한 발전방식이다.

어쨌든 유승민이 노무현과 달리 구체적 실현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 또는 그만한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개인의 정치적 성패야 작고도 먼 얘기나, 당장 급한 건 박근혜 정권의 현실이다. 답답함은 유치한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를 위해 정치가 필요한가, 아니면 권력의지의 충족을 위해 정치가 필요한가. 권력은 수단인가, 그 자체가 목표인가.

정권과 정치인으로서의 성패를 걸고 어느덧 마지막 선택을 해야 하는 임기 반환점이다. 그래서 유승민식 화두를 던진다.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주필 junlee@hankookilbo.com

인기 기사

api_db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