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찍은 사진이다. 당시 예닐곱 살쯤 되었던 이 아이는 처음 만난 내게 쑥스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이렇게 산딸기를 권해 주었다. 의뢰 받은 ‘사진 작업’을 위해 단지 한두 번 정도 만날 생각으로 아이의 집을 찾았던 나는 한눈에 이 순박한 눈망울에 쏘옥 빠져들었고, 황급히 카메라를 들어 그 모습을 남겨 놓았다. 더불어 이 만남이 아주 긴 인연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얼핏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아이의 이름은 화목이. 자연에 ‘귀의’해 강원도 화천의 깊은 산골짝인 선이골 외딴집에서 살아가는 일가족 다섯 남매 중 넷째인 화목이는 어느새 1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스물 한 살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예감은 그대로 실제가 되었고 처음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화목이를 비롯한 그 남매들과 매년 수 차례 이상 거르지 않는 만남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애초 사진을 찍기 위한 ‘대상’이었던 아이들과 나는 점점 함께 뒹굴 거리면서 놀거나, 한데 엉켜 무언가를 ‘하는’ 일에 더 몸과 마음을 쓰게 되었고, 지금은 ‘조카와 삼촌’의 관계라고 할 만큼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어 있다. 물론 그 세월만큼 형제들의 성장 과정도 조금씩은 사진으로 담아왔는데,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가 고스란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사람이 우선인 사진’이라는 말을 두루 얘기하고 다니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다. 사진을 ‘찍는’ 순간보다는 찍기 위한 과정 자체에 더 많은 의미를 두게 된 것이다. 서두르지만 않는다면 소통과 교감이라는 ‘과정’의 수위는 깊을수록 좋고 길수록 남달라진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이 아닌, 대상과의 관계성을 확인하거나 성장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사진 행위’도 그 즐거움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 늘 권하기도 한다.

사실 누구나 인정하지만 거의 ‘인식’하지는 않는다. 디지털로 재편된 ‘사진 세상’이 실제 세상의 엄청난 속도와 연동되어 지나칠 정도로 결과물 중심의 잔치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완성된 ‘이미지’로서만 상찬에 놓이거나 비평을 받으며 또한 누군가의 입과 눈에 오르내린다. 오로지 재현된 ‘결정체’로서의 담론만이 무성한 것이다. 어떻게 잘 ‘찍을’ 것인가가 논의의 중심에 있거나 독창적인 예술로서의 가치만 부각되다 보니 현재의 사진은 상당히 목적지향적이다. 너무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과정’을 이루는가에 따라 사진의 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명제에 대한 고민과 의미는 어느새 과거의 부산물로 치부되어 수면 밖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이게 참 아쉽다. 빠름이 미덕이 되어버린 세상, 이제 자신의 내면에 드리운 ‘대상’과 직접적이고 가까운 ‘대면’의 시간을 오히려 ‘천천히, 깊게, 느리게’ 가져보면 어떨까. 이런 과정을 통하면 오히려 사진은 보편적이지 않은, 창조성으로 채울만한 자신만의 사진 세상을 찾게 될 가능성이 꽤 높다.

가쁜 숨을 조금은 더디게 할 만한 이유는 너무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사진은 학습을 통해 누구에게 배우기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자기표현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대안’이라기보다는 사진을 ‘한다’는 것의 또 다른 방편으로서, 사진을 단지 예술의 범주 안에만 놓기에는 너무도 아깝기 때문이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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