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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칼럼] 대통령의 서재가 궁금한 이유

입력
2015.07.1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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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배신’이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했다. 그 ‘배신’의 정체는 ‘민의’의 이름으로 규정되었지만, 정치적 설득력은 부재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는 ‘윤리적 개인주의’이다. 누구든 ‘집단’으로가 아니라, ‘개별인’으로서 합리적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이 ‘개별인’으로서의 정치적 판단과 입장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대통령이 ‘배신’이라는 이름표를 던지는 것은 부적절하다.

대통령은 ‘배신’ 이라는 용어를 차용하기에 앞서, 정치인들이나 정당들 간의 입장의 ‘상이성’이 존재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정치적 정황에 대하여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했다. 특정한 정당이나 정치인의 정치적 입장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면, 그것에 상응하는 논리적 비판과 합리적 설득을 끌어내면 되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서 정치인이 대통령과 ‘상이한’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대통령은 입장의 ‘상이성’을 ‘배신’이라는 용어로 대체한다.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자’라는 직격탄을 맞은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급기야 원내대표직 사퇴를 해야 했으며, 사퇴사에서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을 인용한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칼 포퍼의 간결한 정의는 이 ‘배신’ 사태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포퍼는 민주주의를 ‘독재의 반대’로 규정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국민들이 자신의 지도자를 선택하고 조정할 수 있는 기회들, 그리고 극적인 혁명 없이도 그 지도자들을 권좌에서 몰아낼 수 있는 기회들을 가지는 것에 있다고 한다.

또한 민주주의는 극소수가 다수의 권리를 장악하는 독재정치 체제와는 달리, 어떤 예외도 없이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정치형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는 대통령을 포함한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으며, 모든 개별인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정의’를 이루어 나가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포퍼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에서 볼 때, 이번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 사태는 민주주의 정신을 정면에서 역행하고 있다.

아주 단순한 논리를 펼쳐보자. 국민들이 선택한 국회의원들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한 당의 원내대표를 선택했다. 그런데 국민들에 의하여 선택된 대통령이 거꾸로 그 국민의 선택을 뒤집는 사태를 가져왔다. 포퍼의 민주주의 이해에 의거하여 보자면, 이번 ‘배신 사태’는 민주 정치가 아닌 ‘독재 정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태이다. 국민이 지도자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민의 선택을 ‘지도자’가 거스르고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입장의 ‘상이성’을 수용하지 못하고, ‘배신’이라고 분노하는 대통령-대통령의 그 분노는 한국사회에 성숙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싹을 아예 짓밟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우려까지 하게 한다.

나는 일련의 ‘배신의 정치’ 사태를 보면서 대통령의 서재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우리 나라 대통령은 도대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으며, 어떤 방식으로 대통령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과 그에 따른 지도력을 연마하고 있을까. 부언할 필요 없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권의 책이 담고 있는 다양한 ‘사상들’과 조우하는 것이며, 그 책의 저자와 비판적 대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관, 세계관, 사회관, 정치관, 그리고 지도력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적 조명을 하게 된다. 성숙한 지도력을 키워나가기 위하여 ‘좋은 책’의 지속적 읽기는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에게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중요한 행위이다.

한국이 그토록 선망하는 미국의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책벌레’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읽어 왔다. 그가 어릴 때는 어떤 책들을 즐겨 읽었으며 지금 그가 읽고 있는 책들이 무엇인지 누구나 알 수 있다. 한국 국민들도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책들을 읽고 어떻게 자신의 사유세계를 확장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세트장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세트장

누구도 완벽하거나 ‘고정된 존재’는 없다. 아니,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라 해도, 완벽한 존재가 아닌 이상 끊임없이 자신을 성숙시키도록 자신의 내면세계를 가꾸며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한 사람의 내면세계를 가꾸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책 읽기’를 통한 ‘이해의 지평 확대’이다. 우리의 대통령이 ‘책 안 읽는 대통령’ 또는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에서 나온 책들로만 가득한 서재를 가진 대통령’이라는 창피스러운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이다. 책 읽기와 비판적 사유-이것은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배신’이라는 개념의 정치적 차용을 보면서, 그녀가 혹시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 조차 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하게 된다. 나는 대통령이 이제부터라도 민주주의에 대하여, 대한민국 헌법이 지닌 포괄적 의미와 그 실천에 대하여, 진정한 지도력에 대하여, 한국사회 안에 다양한 소수자들에 대하여, 또는 이 세계가 씨름하고 있는 긴급한 문제들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확장하게 만들 수 있는 책 읽기를 치열하게 하기 바란다. ‘책 읽기’를 통한 비판적 사유란 지식과 정보의 축척의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대통령을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민주사회의 정치 지도자로서 폭 넓은 시각과 성숙한 지도력을 가꾸어 나가는 데에 반드시 요청되는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이 중요한 책들로 대통령의 서재를 채울 수 있는 ‘범국민 책 보내기 운동’이라도 펼쳐야 하는 것 아닐까.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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