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을 걷다(1)

※ 박광희 부국장의 '강북을 걷다'를 오늘부터 연재합니다. 서울의 살아있는 역사와의 대화,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20여 년 전 결혼하면서 정착한 동네에는 한국의 대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한적하고 신비한 공간이 있었다. 도롱뇽과 가재가 사는 작은 개천,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숲 그리고 조선시대에 누군가가 살았다는 별서 터와 인공 연못. 결혼한 직후 초여름 더위를 피해 아내와 함께 그 곳을 처음 찾았다. 연못 옆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 키 큰 나무들을 올려다 보았을 때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바람 결에 하늘거리던 잎사귀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소풍의 느낌이 좋아 그 뒤로 틈나는 대로 들렀던 숲 속의 비밀 정원이, 그때만 해도 동네 주민 일부만 알던 백사실이라는 곳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울에 이런 곳이 다 있다니…” 하며 감탄했다는 멋진 장소지만, 부암동에는 백사실 말고도 전망 좋은 카페와 미술관, 개성 넘치는 가게 등 보고 들르고 쉴 곳이 많다.

부암동은 북악산과 인왕산에 걸쳐 있다. 이 중 TV 드라마에 나온 카페가 있고 맛난 음식점이 많은 북악산 쪽으로 사람이 몰린다. 인왕산 방향에서는 윤동주동산과 서울성곽 쪽이 비교적 사람이 많은데, 이 때문에 같은 인왕산 쪽이라도 부암동주민센터를 왼쪽으로 끼고 있는 창의문로5길은 언제나 호젓한 편이다. 하지만 이 작은 길에는 선인 세 사람의 흔적이 있어 역사와 인물에 대해 잠시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니 부암동에서 쉬고 마시고 먹는 것만으로는 아쉬운 사람이라면 이 길을 한번 따라 걷는 것도 좋다.

먼저 만나는 인물이 안평대군이다. 이 일대가 바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별서 무계정사(武溪精舍)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배경으로도 추정된다. 안평대군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안견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에는 기암괴석과 바위산이 나오는데 지금의 부암동에 그런 것이 많다.

안평대군은 첫째 형 문종과 더불어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시에 가장 능한 인물로 꼽힌다. 운자가 주어지면 자유자재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시뿐 아니라 서화에도 재능을 보인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였는데,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둘째 형 세조가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안평대군은 역모를 도모했다는 이유로 교동도로 귀양가 죽음을 맞는다.

안평대군이 죽은 뒤 이 일대는 왕의 기운이 서린 땅이라는 이유로, 건물이 모두 철거됐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 안평대군의 자취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은, 바위에 새겨진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각자가 유일하다. 혹자는 이 글씨가 안평대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옆에는 허물어져 가는 한옥이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지은 것으로 안평대군과는 무관하다.

안평대군의 별서 터의 바위에 새겨진 '무계동' 각자. 왼쪽의 한옥은 나중에 세워진 건물로 안평대군과는 관계가 없다.

작은 골목을 경계로 아래 쪽에는 지난해 개원한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이 있다. 대원각, 삼청각과 더불어 서울의 3대 요정으로 꼽혔던 오진암의 건물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원래 조선 말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었던 오진암은 제3공화국의 정치 비사를 간직한 곳으로 특히 7ㆍ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한 중요 논의가 이뤄진 장소로 알려져 있다.

2014년 개원한 전통문화공간 무계원. 한때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였던 오진암의 건물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무계정사 앞 공터는 소설가 현진건의 집이 있던 곳이다. 20여 년 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낡았어도 건물이 있었고 댓돌에 신발도 놓여 있어 사람이 사는 듯했다. 그때도 한국 문학에 족적을 남긴 작가의 흔적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바람과 달리 건물은 끝내 허물어졌고 지금은 달랑 안내 표석 하나만 남긴 채 잡초가 우거진 폐허의 공간이 됐다.

현진건은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뒤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고 동아일보를 사직한 다음 이곳으로 옮겨와 양계를 하며 살았다. 술과 관련한 일화가 풍성한 그는 양계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술 친구들이 찾아오면 닭을 잡아서 냈다.

이 집을 알리는 표석에는 ‘그는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 있다. 그가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과는 어울리지 않았으니 소극적이나마 지조를 지키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무래도 형 현정건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던 현정건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옥살이를 하고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는 동생이 참여한 문예지 ‘백조’ 창간호에 이광수가 글을 싣자 “‘백조’지에 이광수가 동인이 되었다 하니 놀랍기 그지 없다”며 “빨리 동인에서 제거하라”는 비밀 편지를 동생 앞으로 보내기도 했다.

현진건이 살았던 집터. 건물이 모두 철거되고 폐허로 남아 있다.

최근 안평대군 집터와 현진건 집터가 같이 경매에 나왔다.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두 집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어떤 식으로든 보존됐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이곳에서 인왕산 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윤웅렬 별서가 나온다. 1906년에 완성한 이 집은 대한제국 시기에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이 당시 한양도성에서 널리 퍼지던 성홍열을 피하기 위해 지은 별장으로 현재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이 집은 담이 높아 기와 지붕만 보일 뿐 안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원래는 서양식 2층 건물만 있었으나 셋째 아들 윤치창이 상속받은 뒤 한옥을 지었다.

윤웅렬의 별서. 인왕산 자락 깊은 곳에 위치한 이 건물은 현재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윤웅렬은 온건 개화파로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한일합방 이후 남작 작위를 받는 등 친일의 길을 걸었다.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일제가 민족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던 첫째 아들 윤치호는 아버지로부터 남작 작위를 계승하고 학도병 강연과 징병을 권유하는 글을 작성했으며 칙선귀족원 의원을 지내는 등 친일 행위를 했다. 최근에는 그런 윤치호를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교회 강연에서 옹호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윤웅렬 집안은 4대 대통령 윤보선을 배출하는 등 유명인이 많지만 이 같은 친일 행위는 큰 오점으로 남는다.

윤웅렬 집안은 그러면서도 현진건 집안과 묘하게 이어진다. 윤치호의 7촌 조카가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이니 독립운동가와 친일 집안의 친척이 부부가 된 것이다. 윤덕경은 남편 현정건이 투옥 후유증으로 숨지자 “죽은 몸이라도 형님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같이 묻어달라”는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자결했다.

수백 미터 밖에 안 되는 이 짧은 길에서는 이처럼 역사를 잠시나마 생각할 수 있다. 안내문이 너무 간단해 이 같은 사연을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무계정사 터는 관리를 위해서인지 문까지 잠가놓았다.

이 길 옆에는 키 큰 고목이 줄지어 서서 하늘을 가리고 그 나무에서는 새가 깃들었다가 날아간다. 길 가운데쯤의 바위에 옛날의 누군가가 청계동천(靑溪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놓았다. 동천이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의미하니 예부터 이곳 경치가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뜻이리라.

길을 마저 올라가면 인왕산 등산로 입구에 다다른다. 인왕산을 올라가는 여러 등산로 가운데 능선에 닿을 수 있는 가장 짧은 길로 여겨진다. 등산로에 그늘이 많기 때문에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상대적으로 땀을 덜 흘리며 산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도 아는지 모르는지 이 길로 인왕산을 오르는 사람은 드물다.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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