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경제 혼란 가중

화폐·금융자산 가치 폭락 대비, 전자제품·귀금속 사재기 한창

예금주에게 손실 분담 우려 부채 청산하려는 기업·개인 늘어

ATM선 큰돈만… 잔돈 골머리, 일부 기업은 근무시간 단축까지

|||
현금을 인출하려는 그리스 국민들이 8일 유로뱅크 아테네 지점 ATM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UPI 연합뉴스

구제금융 제개 협상이 늦어지면서 그리스 경제의 마비상황도 장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국민과 기업들이 불안감에 사재기와 근무시간 단축 등에 나서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그리스 국민들이 앞으로 닥칠 화폐가치 및 금융자산 가치 폭락에 대비해 전자제품이나 귀금속 등 실물자산 사재기에 뛰어들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NYT)가 8일 보도했다. 12년간 아테네의 전자제품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데스피나 드리시는 NYT에 “진열용 상품마저 다 팔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고객들이 물건을 구해달라며 소매를 붙잡고 사정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보석상인 조지 파파렉시스는 “한 고객이 오늘 가게에 들러 100만유로(약 12억6,000만원) 상당의 귀금속을 사겠다고 했다”며 “그러나 보석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현금보다 더 나을 것이란 생각에 팔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100만유로를 벌 수 있는 기회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지만, 이 결정을 다시 번복할 생각은 없다”며 “이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구제금융 연장의 대가로 그리스 국민의 예금을 일정 비율 낮추는 헤어컷(손실부담)을 강제해 납세 및 빚 상환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퍼지면서 이를 미리 청산하려는 개인과 기업도 늘었다. 회계사인 안토니스 무자키스는 “많은 고객들이 헤어컷이 실행되기 전에 세금 계산을 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며 “일부는 4만~5만유로에 달하는 세금을 당장 지불하겠다고 한다”고 밝혔다. 한 에너지 업체 관계자는 “과세 대상이 될 수 있는 기금을 조정하고 올해 치 세금을 지난주 다 지불했다”고 말했다. 2013년 키프로스의 경우 국제 채권단의 100억유로 지원의 대가로 내놓은 자구책으로 10만유로 이상 예금주들에게 최대 40%의 손실을 강제한 전례가 있어 공포감이 빠르게 확산되는 상태다.

또 그리스 정부가 이날 자본통제 조치를 13일까지 연장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현금자동인출기(ATM) 앞에 선 시민들의 줄은 더욱 길어졌다. 이마저도 계좌 당 인출 한도가 하루 60유로로 제한된 데다, 현금이 동 나 아예 작동을 중단한 ATM도 많아 시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토도리스 라킨치스는 “은행 영업이 중단된 뒤 오늘까지 쓴 돈은 80유로 뿐”이라며 “이러한 조치가 올해 내내 이어질까 걱정”이라고 전했다.

현금 품귀 현상으로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상인들이다. 현금으로 이뤄지는 시장 경매 거래는 중단된 지 오래고, 20유로나 50유로 같은 큰 단위의 지폐만 공급하는 ATM 때문에 잔돈이 필요한 상인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약사들은 현금 부족으로 약을 살 수 없는 환자들을 거절할 수 없어 차용증까지 써 주고 있다. 아테네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미칼리스 모스코나스는 “약국 카운터 아래 채무증서가 셀 수 없이 많다”며 “현금이 없지만 아픈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해외 송금 중지로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의약품을 사올 수 없어 생명을 위협받은 환자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경제 마비로 매출 하락에 시달리는 일부 기업은 직원들에게 근무시간 단축 조치를 내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아테네의 소규모 여행업체에서 일하는 한 여성은 “상사가 근무 시간을 매일 두 시간씩 단축하라고 했다”면서 “직원들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전했다.

신지후기자 hoo@hankookilbo.com

관련 기사

api_db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