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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튀기는 싸움에서 다시 문학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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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튀기는 싸움에서 다시 문학을 발견하다

입력
2015.06.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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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원로 문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아니, 카르텔이 어디 있습니까, 카르텔이. 그리고 솔직히 한국에서 미시마 유키오 영향 안 받은 작가가 어딨어요?” 설명할 것도 없이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문단권력이란 과장이라며 그는 손을 내저었다.

이번 사태가 대중에겐 문학계 간판스타의 이미지 추락 정도로 받아들여졌겠지만, 한국 문학사를 아는 이들에겐 문학사의 소 챕터가 한장 넘어가는 ‘격동의 일주일’이었다. 2000년 문학권력 논쟁 이후 비주류로 밀려난 비평가들, 아웃사이더를 자처해온 작가들이 각종 인터뷰와 토론회에 불려 나와 15년 간 참은 말을 쏟아냈다. 반면 신씨를 위시한 기득권 세력은 크고 작은 내상을 입었다. 표절을 부인했던 출판사 창비의 편집인 백낙청씨는 “백낙청 체제가 깨져야 창비가 산다”는 극언을 들었고, 문학동네의 대표 비평가이자 신씨의 남편인 남진우씨에게는 “과거 표절 작가들 공격하던 기세는 어디 갔냐”는 조롱이 돌아갔다. 가만히 있는 문학과지성사에게는 “왜 가만히 있냐”는 호통이 떨어졌다.

분위기만 봐서는 당장 문단권력이 해체되고 새로운 생태계가 탄생할 것 같지만 실상은 간단치 않다. 사태 와중에 “해외에서 이만큼 알려진 작가는 고은 시인 외 신경숙이 처음이므로 이 귀함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는 발언이 있었다. 문학을 국가 위상 제고용 상품으로 보는 인식이 문인에게서 나왔다는 건 절망의 조짐이다. 문학지상주의와 상업주의의 기묘한 결탁에 민족주의까지 첨가한 이 발언은 문단권력을 지탱하는 사상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견고한지를 말해준다. 문단이 쉽게 바뀌지 않을 거란 전망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신문 기사의 수많은 익명씨들(A씨, B씨, C씨)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 내홍이 지나간 후 다시 문단 시스템으로 돌아가 복무해야 할 사람들이다.

크고 작은 회의 속에서 유일한 위로는 폭로와 해명 과정에 사용된 문인들의 언어를 구경하는 일이었다. 천번쯤 문질러 닦은 마룻바닥처럼 반들반들한 문장들은, 문학의 위기 속에서 역으로 문학의 힘을 증명하는 사례가 됐다. 표절 의혹을 처음 제기한 이응준 소설가는 허핑턴포스트에 올린 원고지 38매짜리 글을 몇 달간 붙잡고 있었다고 한다. 법적으로 문제될 소지를 검토했겠지만 그 시간 중 상당수는 언어를 조탁하는 데 쓰였을 것이다. 글을 본 사람들은 “폭로문이 아닌 폭로작”이라는 상찬을 보냈다. 그가 표절 근거로 제시한 ‘기쁨을 아는 몸’이란 표현도 기가 막히다. 성에 눈뜬 여자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김후란 시인은 ‘사랑의 기쁨을 알았다’고 해도 될 것을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농밀하고 관능적인 언어를 창조했다. 문학동네 진영 신형철 비평가의 글은 판정과 해명, 반성과 당부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중 어느 하나로 분류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지점을 발명한 것처럼 보인다.

신경숙 작가는 “절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쓰고 항아리에 넣어두더라도 쓰겠다. 내 땅이 문학이기 때문에 땅에 넘어지면 땅을 짚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피 튀기는 와중에도 문학의 눈치를 보는 이 미련한 세계의 특질과 같은 것이기를 바란다.

이응준씨는 “예술가에게도 도덕은 있으니, 그것은 ‘예술에 대한 도덕’”이라고 말했다. “문인이 안하무인일 수는 있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안하무인일 수 없다. 문인이 범죄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범죄자여선 안 되는 것이다.” 신씨의 차기작이 항아리로 들어갈지 책으로 출간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거기서 그는 문학에 대한 자신의 신앙이 진짜라는 사실을 다시 증명해야 한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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