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에서 예전에는 많이 쓰였지만 최근에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 말들이 있다. ‘기득권’은 그 가운데 하나다. 기득권이란 정당한 절차를 밟아 차지한 권리를 뜻한다. 기득권 또는 기득권층이 최근 자주 분석되지 않는 이유는 사회의 균열을 드러내는 계층ㆍ지역ㆍ세대 등 다른 유용한 개념들이 존재하는 데 있다. 하지만 오늘날 기득권만큼 사회 현실을 생생히 증거하는 말은 없다. ‘땅콩 회항’ 사건에서 볼 수 있듯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은 기득권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목할 것은 이런 기득권이 약화된 게 아니라 강화돼 왔다는 주장이 최근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년 동안 세계를 뒤흔들었던 토마 피케티의 ‘세습자본주의론’은 적절한 사례다. 부유층 안에서도 기득권자들이 경제를 장악하고, 재능보다 태생이 중요하다는 피케티의 논리는 설득력이 너무나 높은 나머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나지 않는, 불평등이 공고화되고 구조화되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기득권이 우리 사회의 경우 소수 재벌기업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시장에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대해, 성장의 혜택에서 기성세대는 청년세대에 대해, 학벌사회에서 명문대생은 지방대생에 대해 기득권을 갖고 또 행사한다. 정치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적지 않은 정치 지망생들이 여의도 입성을 꿈꾸지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제도화한 기성 정치질서의 문턱을 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갈수록 구조화되는 ‘기득권자 대 아웃사이더’의 분리다. 유산 상속을 통한 ‘부의 대물림’, 명문대 입학을 통한 ‘학벌의 대물림’, 자녀 취업 보장을 통한 ‘고용의 대물림’ 등은 기득권자들이 누리는 크고 작은 권력의 성채를 이룬다.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의 미시적 연구를 수행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기득권자들은 집단 응집력, 내부 통제, 동일한 규범 및 정체성의 강화를 통해 자신들과 아웃사이더들을 분리시킨다. 그리고 이런 분리 과정은 사회구조를 아웃사이더들이 처음부터 불리한 상태에서 게임을 치를 수밖에 없는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변화시킨다.

우려스러운 것은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의 분리가 공고화되는 과정에서 사회통합의 토대를 이루는 정의(justice)가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세대 간 정의’ 문제다. 예를 들어, 장년세대의 정년 연장이 청년세대의 일자리를 줄이는 것을, 연금 개혁에서 다음세대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혹시 기성세대는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의도하진 않았지만 청년세대를 아웃사이더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노후 일자리 창출이나 노후 빈곤 해결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세대가 지금세대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어디까지 부담을 떠안는 게 적절한 수준이냐는 데 있다. 세대 간 정의란 세대들 사이에 이익이 충돌할 때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손익의 합리적 기준을 찾아내는 것을 뜻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세대의 삶을 위해 다음세대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할 수 없고, 세대 간 정의라는 감각에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서구사회에서 기득권자 대 아웃사이더 담론을 역사적으로 약화시킨 것은 1960년대 이후 다원주의의 확산과 복지국가의 구축, 그리고 능력주의의 강화다. 역설적인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세습자본주의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의 분리가 새롭게 공고화되고, 이러한 지구적 흐름에서 우리 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적인 ‘엘리트 대 대중’, 진보적인 ‘자본 대 노동’의 이분법과는 사뭇 다른 기득권자 대 아웃사이더 간의 다양한 분리들을 주목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이며 섬세한 대책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우리 사회는 이미 도달해 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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