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촌기자 앞치마 두르다] 4. 요리가 만만해 보일 때쯤

“고마 됐다. 이 정도 요리하면 묵고 산다.”

수십 년 요리경력을 갖고 있는 호텔 주방장의 독백이 아니다. 요리인생 일주일, 아니 5일 만에 내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다. 누구 들으라고 한 말도 아니니 진심이기는 했다. 사실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있지만.

첫 수업 때 배운 콩나물밥이 뿌듯하기는 했어도 역시 밥은 하얀 쌀밥이었다. 불린 쌀과 물을 1대 1로 냄비에 담아 약불에 15분 정도 올려놓기만 하면 된다. 지금까지 배운 쉰 한 가지의 요리 중 레시피가 가장 간단한 종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 쉬워 약불이지, 약불이 어느 정도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참 딴 짓 하다 보면 불이 꺼져있기 일쑤였고, 조금 불을 세게 해놓으면 탄내가 솔솔 피어올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집 주방에는 가스레인지 대신 인덕션이 깔려 있었다. 두 번이나 솥을 태워먹은 아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화재 우려가 없는 인덕션으로 갈아치운 것이다. 자기장을 이용하는 인덕션은 전용 냄비와 후라이팬을 사용해야 하고, 석쇠구이를 할 수도 없었지만 1에서 9까지 9단계의 화력이 수치화되어 있어 ‘감’이 떨어지는 초보에게는 그저 그만이었다.

처음에는 3단계에 맞췄다. 도대체 물이 끓을 생각을 안 한다. 이번에는 5단계로 올렸다. 1인분 밥의 절반이 누룽지로 변했다. 그것도 밑 부분은 검게 타버려 먹지도 못했다. 4단계로 밥을 지었더니 화력은 맞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시간이 문제다. 밥할 때마다 언제 불을 끌 지가 애매했다. 그러다 스스로 타이밍을 터득했다. 밥이 다될 무렵이면 밥솥 안에 거품이 한가득 일었다 사라지는데, 거품이 없어질 때쯤 불을 끄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밥을 휘휘 저은 후 잔불에 뜸을 들이면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쌀밥이 탄생하는 것이다.

밥-죽-국수 '3종 세트'

“아빠, 맛있어.” 맏딸이 인정한 아빠의 첫 요리다. 그 말에 힘입어 우리집 ‘요리 계엄령 1호’를 선포했다. “이 시간부터 전기밥솥은 사용금지다.”

두 번째 수업 때는 장국죽이 등장했다. 죽 요리의 골자는 절구에 쌀을 찧어 싸라기로 만든 후 1대 6 비율로 물을 섞는 것이다. 장국죽도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진 쇠고기에 ‘파마간참후깨설’로 양념한 후 약불로 먼저 볶는다. 그 후 표고버섯 넣고, 싸라기 넣어 볶다가 물을 부은 후 센불에 끓인다. 한 소끔 끓은 후면 약불에서 주걱으로 휘젓기만 하면 된다.

집에서는 이렇게 먹으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다. 그런데 한식조리사과정에서는 하나의 과정이 더 남았다. 죽 그릇에 담아 표고버섯으로 해바라기 모양을 내줘야 끝나는 것이다. 그후로도 계속 음식 모양내기에 들인 공이 이만저만 아니다. 어쨌든 ‘응이, 미음, 죽, 밥’ 이렇게 곡물의 네 단계 변신 과정에서 밥과 죽을 마스터했으니 굶을 일은 없다고 보면 된다.

세 번째 수업에 선보인 요리는 국수장국이다. 칠판에 적힌 레시피가 길다. 석이버섯 불리고, 육수 만든다. 계란을 노른자 흰자 분리하고 호박은 5㎝로 채 썰어 소금에 절인다. 석이버섯도 채 썰어 소금과 참기름에 절이고 편육은 5㎝ 길이로 채 썬다. 후라이팬에 약불로 계란 지단을 만든 후 5㎝로 채 썰고 호박을 익힌다. 불 끄고 잔불에 석이버섯을 볶은 후 국수를 삶는다. 800cc의 육수에 소금 4cc, 국간장 5cc를 넣으면 간이 적당하다. 국수 타래 위에 호박과 편육, 황백 지단, 석이버섯, 1.5㎝ 길이의 실고추를 올려놓고 육수를 고명 바로 아래까지 부으면 국수장국이 완성된다.

레시피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다. 속칭 잔치국수를 만드는 과정에는 새로운 조리법이 많이 등장했다. 지금도 나를 괴롭히는 지단 만들기가 대표적이다.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한 후 저어서 약불에 익히는 것이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약간 두른 후 얇게 익혀내는 지단은 고명으로는 단골손님이다. 그런데 지단이라는 놈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검은 색 자욱하게 굽혀버린다. 제 색깔을 살려야 하는 지단으로서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특히 흰자는 변색도 쉽고 걸핏하면 엉키고 찢어져 골칫덩어리다.

하지만 이 수업을 통해 국수 삶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터득했다. 물이 끓을 때 국수 면발을 넣는다. 이 물이 거품을 내고 냄비 끝까지 솟아오를 때 찬물 100cc를 붓는다. 이렇게 끓어오를 때마다 세 차례 물을 부어주면 국수가 탱탱하게 삶겨진다. 따로 시식할 필요도 없다.

자, 이제 국수도 완성했다. 3월9일 첫 수업 때 배운 콩나물밥을 응용해 쌀밥을 짓고, 11일 장국죽, 13일에는 국수장국까지 밥 죽 국수를 모두 만들었다. 13일 밤에는 요리학원 수업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국수를 한번 더 만들어 봤다. 비교적 쉬웠던 쌀과 장국죽에 비해 국수가 까다롭기는 했지만 학원에서 한 번 해본 터라 그런대로 국수 모양이 나왔다.

5월 초 쯤인가, 맏딸이 물었다. “아빠 음식 중에서 내가 제일 맛있게 먹은 종목이 뭔지 알아?” “글쎄…, 찜갈비, 불고기, 뭐지?” “국수야, 국수.” “아니 왜?” “맛있는 걸 맛있다고 하는데, 왜 맛있냐고 물으면….” 대장금 패러디에서 대화는 끝났지만 국수가 가장 맛있었다고 한 것은 뜻밖이었다.

요리 시작 5일 만에 대한민국 대표 음식인 밥과 죽, 국수를 만들고 나니 요리가 갑자기 만만하게 느껴졌다. 가뜩이나 간식보다는 주식 위주로 폭식하는 나로서는 밥 죽 국수를 만들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했다. 요리를 절반은 정복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요리교실이 거의 마무리로 치닫는 지금은 정반대다. 한식 중에서도 이름도 모르는 요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구경도 못한 요리도 널려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요리는 초라해지고 있다.

jhjun@hk.co.kr

'요리 별 거 아니네'라는 생각을 하던 기자.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더 큰 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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