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은 비민주적이다. 무언가를 토론에 부치는 것, 그래서 논쟁‘거리’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대자본 혹은 권력의 효과적인 지배형식이 됐기 때문이다. 논쟁을 살펴보면, 우습게도 ‘사소한’ 사실들이 객관이란 탈을 쓰고 대립한다. 진실도, 보편도 아닌 일면적 사실들은 논쟁을 통해 스스로를 부풀리며 진리를 자처한다. 그 사이 사태의 본질은 왜곡되거나 사라지고, 우리는 도대체 왜 이 논쟁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 하는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이를 놓칠 리 없는 매스미디어는 ‘모두 틀렸다(혹은 맞다)’라는, 한 번도 틀린 적(혹은 맞은 적) 없는 판결을 때맞춰 내리고, 우리는 다시 각자 일상으로 후퇴한다. 이로써 그들의 지배가 완성된다.

지배 효과를 배가하는 것은 ‘반복’이라는 형식이다. 약 150년 전 삼촌을 본 따 황제가 된 조카를 보며, 한 사가(史家)는 이전 사가의 말을 빌려 “역사(사실과 인물)는 두 번 반복”됨을 상기시켰고, 비극과 소극(笑劇)의 교대라고 명석하게 보충했다. 이 반복 메커니즘은 비극이어야 할 역사마저 희극도 아닌 삼류 코미디로 전락시킨다. 그만큼 강력하다. 새로움이 들어설 공간을 봉쇄할 뿐만 아니라 관객의 냉소를 재생산하기 때문이거니와, 이는 대자본 혹은 권력이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반영한다.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올해의 최저임금 논의도 논쟁과 반복의 지배형식에 포섭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소한 사실 몇 개가 추가됐고 등장인물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경영계는 낡은 레퍼토리를 수정하지 않을 모양이다. 임금 부담이 늘면 경쟁력이 떨어지고 고용은 더 준다는, 소위 ‘임금숙명론’을 협박처럼 내놓았다.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양 “중소영세기업은 인상된 임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걱정도 덧붙였다. 이 어설픈 연기로 원하청구조를 유지하려는 속셈을 감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노동계의 대응도 보잘것없긴 마찬가지다. 임금-고용 상충관계라는 통념이 허구라는 것은 이미 밝혀졌음에도 새로울 것 없는 사실들에만 기대어 논쟁에 열심이다. 반론이라 봐야 고작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을 줄인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거나(국제노동기구), 생산성을 높이고 이직률을 낮춰서 기업에도 이익이 된다(폴 크루그먼)는 정도다. 최저임금 문제는 원하청구조, 즉 이 사회의 착취피라미드를 상징하는 표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적하거나 새로운 의제로 확장ㆍ전환시키려는 능력도, 의지도 없는 듯하다.

그 사이 이 중요한 의제는 대자본이 펼쳐놓은 무대에 갇히고 만다. 노동계의 반론은 물론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단지 소극이라는 무대 위에서만 유효하다. 새로울 게 없는 서사에 관객의 냉소까지 감안하면, 이 극이 흥행에 성공할 리 만무하다. 적극적 논쟁을 포기하란 게 아니다. 삼류 코미디라는 형식을 구축해 최저임금 논의의 본질을 제거하는 것이 대자본의 속셈인 만큼, 그 형식 자체에 타격을 가할 새로운 무엇을 상상하고 제기하란 얘기다.

그 새로운 무엇은 윤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최저임금은 본질적으로 윤리적 물음이다. 그 동안 턱없이 많은 이윤을 부당하게 독식해 온 대자본의 행태를 질문에 부치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비윤리적 원하청구조 (물론 시장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더 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부당이윤을 ‘얼마나 줄이느냐’의 문제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고용이나 경쟁력 따위와는 무관하다.

윤리의 관점에서 재구성할 때 최저임금 ‘논쟁’은 비로소 ‘전선’이 될 것이다. 논쟁이 무관한 문제를 끌어들여 사태를 마감하려는 자본의 지배형식이라면, 윤리가 장착된 전선은 시민 행동을 여는 변화의 장이다. 노동계의 소임은 이를 위한 구체적 전략을 제시하는 일이다. 실패하면 올해 논의도 해마다 반복된 해프닝으로 막 내릴 것이다. 그 소극의 책임은 노동계에 있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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